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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趙英男, Jo Young-nam) 인물백과사전

쿠카곰돌이 2020. 3. 2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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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영남 (趙英男, Jo Young-nam)
출생 1945년 5월 13일(음력 1945년 4월 2일, 74세)/황해도 평산군
본관 배천 조씨
신체 O형
학력
강문고등학교
한양대학교 성악과 중퇴
서울대학교 성악과 명예학사
트리니티 신학대학교 학사
병역 육군 병장 만기전역
데뷔 1968년 노래 '딜라일라'
종교 개신교
가족 동생 성악가 겸 교수 조영수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1963년 말 데뷔해 한국 대중음악과 성악을 가요에 접목시켜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가수.

사실 본업인 음악 뿐 아니라 작가, 화가, 방송인, 라디오 DJ 등 다방면으로 활동해왔다. 솔비나 구혜선, 홍서범 등도 종합 예술인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들보다 앞선 조영남이 원조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실상은 성희롱이나 각종 사건사고, 그림 대작 등 여러가지 구설수나 계속해서 만들어대는 트러블 메이커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황해도 출신이라 분단의 아픔과 지역감정의 대립 등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역감정으로 갈라서기 시작한 경상도와 전라도의 화합을 내포한 '화개장터'라는 곡을 불렀다. 참고로 조영남은 작곡만 했고 작사는 친구인 김한길 전 의원이 했는데, 그 친구는 다른 쪽으로 유명해졌다.

1945년 5월 13일(음력 1945년 4월 2일),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나, 1.4 후퇴의 피난 행렬에 섞여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이주했다.

조영남은 용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다가 1962년에 한양대학교를 자퇴하였는데, 자퇴의 이유가 재밌다. 2013년 10월에 방송된 SBS '좋은 아침'에 조영남은 한양대 성악과 후배 김승일과 함께 출연하여, 한양대를 자퇴한 이유를 설명하며 "2학년이 됐는데 신입생 여자 아이들 중에 정말 예쁜 여자가 들어왔었다. 그 여자가 한양대학교에 오는 걸 매일 몰래 봤다. 걔가 입학한 후로 온 정신은 '그 애와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였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내가 사회를 보면서 걔를 의식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약혼자가 있는 여자였다. 학교에서 그 여자와 내가 데이트 한다는 소문이 났고 약혼자가 날 찾아오기까지 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조영남은 "학교에 퍼진 소문 때문에 자퇴하게 됐다. 다시 공부해서 서울대에 갔고 그 여자는 파혼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15년 10월 방송된 MBN '속풀이쇼 동치미'에 출연해서는 한양대 자퇴에 대해 "잘렸다"는 말을 하였다. 즉 이날 방송에서 조영남은 "내가 한양대학교에 다니다 뜨거운 연애를 하고 잘린 적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출연진들이 "연애를 한다고 학교를 잘리냐?"며 의아해했고, 조영남은 "약혼한 여자와 눈이 맞은 거였다. 그 때는 내가 전액장학금을 받는 학생이었으니까 그러면 안 되는데…. 예쁜 걸 어떻게 하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자퇴서를 냈다. 이후 공부를 해서 다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

이후 1964년에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였는데, 1968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대 성악과도 이후 자퇴하였다. 다만, 2000년대 들어 서울대학교 측에서 조영남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서울대학교 자퇴의 이유에 대해 조영남은 2010년 9월 방송된 ‘황금어장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여 “서울대 음대를 다니던 중 미8군 오디션을 보고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깜짝 놀랄 만큼 수입이 좋아 더 이상 학교 다닐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자퇴했다”고 밝혔다. 

조영남은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밤무대를 전전하다 주한미군이 운용하는 쇼룸에서 팝송을 부르다 성악을 그만두고 상업가수의 벌이가 좋은 것을 이유로 상업가수로 전환, 1968년에 '딜라일라'라는 번안곡으로 데뷔한다.

이 딜라일라로 방송에 데뷔했는데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데뷔하자마자 굉장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본인도 본인 저서나 출연방송에서 본인은 거의 무명 시절은 없었던 편이라 회고하곤 한다.) 이후 텔레비전이 지금처럼 절대적인 대중매체가 되기 전 시절이었음에도 TV에 자주 나와 TV를 자주 못 보던 서민들도 가수 조영남을 아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 젊은 층은 화개장터밖에 모르지만 조영남과 같은 세대거나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윗세대 어르신들의 경우 70년대 유명하던 대중 클래식 가수였다고(실제로는 번안 스탠다드팝 가수지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70년대 LP로만 음반을 발매하던 시절에 7만 5천장을 팔았다고 하니 90년대 기준이면 밀리언셀러 못지 않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한 인기 가수인 것.

스타가 되어 돈을 벌고 좀 먹고 살 만해진 뒤엔 본인이 한때의 굶주림에 상업가수로 전향한 것을 후회했는지 동생인 조영수가 성악가가 되길 원하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1971년, 군생활 도중 알게 된 영화배우 윤여정과 결혼한 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주도한 여의도 평화집회에서 성악 쪽 담당자들을 수소문하고 직접 지휘한 후 빌리 그레이엄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 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수로 돌아오면서 활동도 왕성했지만, 집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끝내는 윤여정과도 갈라섰다. 스스로도 윤여정과 갈라섰을 때를 매우 반성하지만, 진심으로 윤여정을 위한다면 윤여정의 'ㅇ'조차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여론이 대다수다. 사실 조영남은 옛날부터 악명높은 바람둥이였는데, 결혼하고도 그 버릇을 통 고치지 못했다. 그런데다가 돈도 한 푼도 벌지 않았다. 오죽하면 쌀독에 쌀이 없던 날이 있던 날보다 많았다고 했을 정도다.

무릎팍도사 윤여정 편을 보면 알듯이 윤여정에게는 이게 엄청난 트라우마다. 실제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조영남의 'ㅈ'조차도 꺼내지 않았으며, 그 기세등등한 강호동과 유세윤도 몸 둘 바를 모른 채 진행을 했을 정도.
물론, 조영남 본인도 직접 "그녀가 입을 열었다면 조영남이란 사람은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라며 잘못을 시인했다. 그래놓고는 나중에는 윤여정이 못생겨서 같이 잘 수 없다는 초특급 망언을 했다.

지금이야 양원경처럼 결혼 생활 내내 개막장 짓거리를 저질렀다거나, 송종국처럼 불륜(간통)을 저질렀다거나 하는 등의 예들처럼 어마무시한 사고를 친 것이 아닌 이상, (이혼에 대한) 인식은 제대로 잡혀서 이혼하고도 누구든 응원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저때 여자 연예인들에게 있어서는 이혼하면 마약 복용 같은 수위 높은 사고를 저지른 후 브라운관에 복귀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동급으로 여겨졌을 만큼 사회에서 매장당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였다.

조영남과 이혼을 했던 윤여정 역시 그 때문에 매장당할 뻔했지만, 본인과 가까웠던 김수현 덕분에 생활연기인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재기에 성공했다. 이러니까 조영남의 'ㅈ'만 들어도 경기할 만큼 증오하는 것은 당연지사. 윤여정에게는 당장 지우고 싶은 악몽이 바로 그 때다. 그런데도 조영남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를 "첫번째 결혼시절"이라고 말한다. 온갖 쓰레기짓을 다 하고 살았으니 잘도 편했겠지! 윤여정, 그리고 아들과 함께 지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말과 함께 당시 세 가족이 함께 찍었던 사진을 이용하여 미술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하여간 조영남은 이혼 후에도 정신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과 엽색 행각을 벌였으며, 80년대에는 자주 여성지에 이름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자신은 자유로운 정신으로서의 자유 연애, 결혼 제도에 대한 실험이라며 되도 않는 변명을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그냥 쓰레기 같은 할배. 이 사람 이상의 개막장은 임택근 정도가 있다. 조영남이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수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로부터, 특히 중장년층 어르신들에게 평판이 극도로 나쁜 이유도 다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한테 이미지가 좋냐면 그것도 절대로 아니다.

이혼 후에는 방송에 인생을 올인하여 체험 삶의 현장으로 대표되는 체험 다큐 형태의 방송을 이끌었으며, 2000년대 중반에는 MBC 표준FM 16~18시 슬롯 <최유라, 조영남의 지금은 라디오시대>에 발탁이 되어 라디오로도 발을 넓혔다.

보조 MC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는데 미국에서 MC로 성공한 자니 윤을 불러와서 그를 메인 MC로 한 '자니윤 쇼'에 조영남이 보조MC를 맡았는데 두 사람의 호흡이 너무 잘맞아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가수 쪽은 공식적인 은퇴 앨범을 낸 만큼 폐업 상태이나 프로그램의 PD들이 찾아와 사정을 하면 한두 곡 정도는 불러준다.

한국 연예인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이자 재산가이다. 그가 살고 있는 청담동 고급 빌라는 연예인이 살고 있는 집 중 제일 비싸다고 하며, 공시지가만 50억 이상, 실거래가는 백억이 훨씬 넘는다고... 사실 그 고급 빌라는 조영남이 아주 오래 전 구입한 것으로, 구입 당시에는 그리 고가가 아니었으나 재건축만 2번을 거듭하다보니 주변 시세와 맞물려 건물 가격이 폭등한 것. 게다가 집값이 너무 비싸다 보니 팔리지도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실제로 정말 작정하고 돈을 모았으면 지금의 재산 따위 푼돈으로 여길 정도로 엄청난 갑부가 되었겠지만 전술한 바람기를 바탕으로 한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들한테 돈을 거의 뿌리다시피 하면서 재산을 홀라당 까먹기가 일상다반사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인기가 좋아서 돈을 엄청 잘 벌어서 저런 재산가가 된 것이다. 특히 재건축을 거듭할때마다 그 집을 팔라는 요구는 있었는데 본인은 그 집 자체가 좋아서 그걸 지키고 싶어 안 팔았다고 한다.

은퇴 이후에는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주로 그리는 게 화투 그림을 크게 확대한 그림이다. 아무튼 이 화가 타이틀로 개인전도 여러 차례 열었고 KBS2의 명작 스캔들이란 프로그램에 미학 칼럼니스트 기믹으로 출연도 했다. 하지만 괜히 조영남이 아닌지라 사건사고 문서에서 설명하듯 큰 사건을 또 일으켰다.

이런저런 안 좋은 행각들이 크게 알려진 뒤론, 그의 취급은 거의 범죄자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면, 품위있는 행동을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려준 인물.

과거에 에버랜드의 시설 중 하나인 지구마을의 노래도 조영남이 불렀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지구마을 항목을 참고하보면 해당 곡은 윤석중이 작사하였고 김규환이 작곡하였다고 나온다. 아마 행사 때 부르거나 했던 게 와전된 듯 한데 에버컴티에서 한 회원이 지구마을 개장당시 나눠줬던 지구마을 LP판을 보면 작사는 윤석중,작곡은 김규환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가수로는 조영남이 참여했다고 표기되어 있어 사실이다.

보통 가수들이 세상을 떠나면 장례식에서 그 가수의 유명한 노래를 불러주는게 관례인데, 조영남은 이것 때문에 난감하다고 토크쇼에서 말한 바 있다. 즉,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부를 노래는 보나마나 공전절후의 히트곡인 '화개장터'일 텐데 가사부터가 '구경한번 와보세요' 로 장례식 분위기 완전 엎어놓을 노래이다 보니... 더 웃긴 건 그보다 더한 가수도 있을 뻔했었다는 사실. 바로 즐거운 잔칫날(잔치잔치 벌렸네~ 로 시작하는 그 노래)로 유명한 블루벨스 중창단 이야기다. 2001년 원로가수 고운봉 장례식에 왔던 원로 코미디언 남보원이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 그래서 이후 조영남은 자신의 장례식 때 불러달라는 곡을 직접 만들었다... 는데 사실 '모란동백'은 조영남이 만든 노래가 아니다. 원래 있던 곡을 리메이크한 것. 그런데 놀러와에서는 자기가 만들었다고 개드립을 쳤다. 근데 꼭 자기가 만들었다고 한 것이 아니라 뉘앙스가 "나 죽으면 이거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부른 노래임" 으로 들리기는 했다.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 당한 적이 있으며 마라톤 대회에서 같이 달린 사람들은 이게 몰래카메라인지 알고 쉬엄쉬엄 달렸을 때 자기 혼자만 죽어라 뛰었다. 응원하던 다른 연예인들(동기 및 코미디언들)이 응원 플래카드를 들고 조영남 이름을 불렀는데 그 플래카드 앞에는 '필승' 이런 격려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그 플래카드들을 뒤집자 '완전히 돌았군!' 같은 말들로 반전을 보여줬으며 물론 시청자들만 보게 만들었다. 경규옹 정의구현.

그리고 결승선을 통과하여 축하하는 폭죽을 터뜨리면서 '몰래카메라에 속으셨습니다~' 현수막이 내걸렸는데 본인은 숨이 가뻐서 헥헥거리느라 그걸 보지도 못했고 이경규와 다른 사람들이 저거 보라고 한 다음에야 그걸 보더니만 정말로 열 터져서 이경규 등짝을 때리면서 "야... 난 죽어라 달렸어!"라며 열 터지는 마무리를 지었다.

어떤 코미디 프로그램에선 이주일과 함께 나왔는데, 둘 다 타이즈를 입고 타이즈 안에 커다란 포탄을 넣고선 사타구니 쪽이 묵직하게 축 늘어진 것을 보여주며 웃기기도 했다.

이주일 문서에서 서술했지만 이주일이 생전에 유일하게 외모로 우위를 점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극장식당에 출연해 그의 얼굴을 본 어린아이가 울자 이주일이 한 촌철살인 멘트는 압권. 자세한 것은 이주일 문서로.

그리고 또 다른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조영남 노래를 코미디 뮤직 비디오로 만든 것에서 도시로 온 시골 총각을 연기했는데 서울 와서 구두닦이로 일하는데 어느 꼬마아이가 운동화 닦아달라고 발을 내밀자 어이없다는 듯이 보다가 구두약 묻은 손으로 아이 볼을 꼬집는다. 그러다가 이를 본 아이 아빠가 화내면서 구두약을 조영남 얼굴에 된통 칠하는 보복을 당했으며 MBC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최병서 및 배일집 같은 코미디언들과 코미디 연기도 한 바 있다.

군대 시절 조영남은 육군본부에서 행정병으로 근무를 했다. 근데 웃긴건 자기 대학교 동창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본인의 중대장으로 있는 바람에 되려 꿀이란 꿀은 죄다 빨고 편하게 군복무를 하다 왔다고.

진짜 의외의 사실인데 건설안전 노래를 불렀다. 노가다를 하는 사람들은 아침마다 아주 지겹도록 듣는 노래 중 하나이다.

일본에 조영남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 인물로 콘도 마사히코가 있는데, 참고로 이 사람도 조영남이 데뷔한 지 1년이 되는 해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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