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金正恩 Kim Jŏng Ŭn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3대 최고지도자
출생 1984년 1월 8일 평안북도 창성군 강원도 원산시 소재 김정일 특각 602호 초대소
신체
키 167cm 체중 130kg대 A형
직업 군인, 정치인
정당 조선로동당
경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2010년 6월 4일 - 2010년 9월 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2011년 12월 17일 - 2012년 4월 13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2011년 12월 30일 - 현직 )
조선로동당 제1비서(2012년 4월 11일 - 2016년 5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2012년 4월 13일 - 2016년 6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제13기 대의원(제111호 백두산 선거구)(2014년 - 2019년)
조선로동당 위원장(2016년 5월 9일 - 현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2016년 6월 29일 - 현직 )
북한의 현 최고 권력자이자 독재자이다.
김정일과 고용희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청소년기에 유럽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 '박운'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다.
2011년 12월 17일에 아버지 김정일의 사망과 함께 수년 전부터 준비된대로 권력을 세습했다. 집권하고 난 이후 자주 직함을 변경했다. 김정일이 죽은 직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조선로동당 제1비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직함을 달고 있었으나, 2016년 6월 29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3기 제4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를 국무위원회라는 조직으로 개편하고 제1비서 명칭도 '당 위원장으로 고쳤다.
2019년 기준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 조선로동당 위원장 겸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 등을 겸직하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Chairman Kim'이라고 불리는 중. 북한 현지의 언론(로동신문이나 조선중앙통신 등)에서 부르는 풀명칭은 2019년 7월 1일 기준으로 "조선로동당 위원장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무력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국가, 무력의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이다.
집권 이후 스탈린식 숙청을 자행하였고,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하고 이복형 김정남을 살해하였다. 또한 유엔과 국제 인권단체들이 지적한, 북한 전역에서 자행되고 있는 사법살인, 정치범수용소 운용, 노예제, 고문, 구금, 강간 및 기타 형태의 성폭력, 강제 낙태 등 반인도적 범죄들의 최고 책임자이기도 하다.
2018년, 평창올림픽의 성공을 돕겠다는 깜짝 제의를 한 것을 시작으로 남북정상회담에 나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고 이를 통해 '비핵화'와 '종전'을 약속하면서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 남북관계, 북미관계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 주인공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2020-03-06 13:08:12-0900 현재까지 북측이 비핵화를 위한 유의미한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으며, 정권 차원의 각종 폭압적이고 반인권적인 범죄 행위들이 줄어들지도 않았기 때문에 주목하는 만큼이나 경계해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2019년 들어서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 러시아 방문, 중국 시진핑 주석과의 회담, 남북미정상회담 등 다각도의 외교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결정적인 변화나 성과는 거두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김정은은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스위스 베른의 공립학교인 'Liebefeld-Steinhölzli Schule'에 다녔다. 영국의 타블로이드(찌라시) 더 선과 이를 인용해 보도한 조선일보에 의하면 그가 스위스 베른 국제학교에 재학했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정은의 형인 김정철이 1994년에서 1997년까지 베른 국제학교를 다녔다. 스위스 유학 당시 그가 김정일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그가 살던 베른 시 당국 조차도 그가 북한 대사관 직원의 아들 '박운'으로 알고 있었다. 학부모 참여 행사가 있을 때면 항상 갖가지 변명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그의 스위스 유학생활에 관해 정확히 알려진 것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스위스 생활에 관한 여러 보도들은 여타 북한 관련 보도들과 마찬가지로 추측으로 가득한 자극적인 가십거리였다. 하지만 최근 그의 학창시절 가장 친한 친구였던 포르투갈 출신 이민자 2세인 요리사 주앙 미카일로가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150회에 출연해 김정은의 스위스 생활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들을 처음으로 매스컴에 공개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가십성 보도들과 달리 미카일로는 김정은의 가장 친한 친구임이 훗날 평양 초청과 방문에서 보듯 확인되었고, 장시간 인터뷰한 내용이 김정은의 가족관계나 여타 팩트에도 완벽히 부합하기에 김정은의 스위스 시절에 관한 가장 신빙성 있는 정보라고 할 수 있다.
미카일로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은은 여태까지 알려진 바와 같이 학교에서 낙제를 겨우 면했다거나, 적응에 실패하여 친구들과 교사에게 안하무인식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조용한 성격으로 친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수학에 뛰어나며 성적도 꽤 괜찮은 학생이었다. 김정은의 가장 큰 관심은 농구였는데, 그는 축구 밖에 모르던 친구들의 흥미를 농구로 돌려놓았다. 농구를 할 때면 항상 이기려는 승부욕을 보였다고 하는데, 미카일로는 그 나이대에는 모두 이기고 싶어한다며 지나친 승부욕은 아니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했다. 김정은은 농구를 할 때면 고급 나이키 농구화와 유니폼을 입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에 체육 선생님은 김정은에게 '장비는 잘 갖췄는데 실력이 프로가 되려면 멀었다'는 농담을 했고 김정은은 웃어 넘겼다고 회고했다. 또 흥미로운 것은, 김정은은 학교에 다니면서 기본 과목 중 하나인 '고급 민주주의' 과목을 들었다는 점이다. 우엘리 스튜데르 교사는 그의 제자 김정은에게 고급 민주주의 수업을 가르치면서 그가 북한의 로동당 위원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고 CNN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김정은은 자신과 가장 친한 미카일로와 또 다른 한 친구를 가끔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살던 집은 스위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세대 주택으로, 호화로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조용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학교를 도보로 걸어다닐 만큼 가까운 곳에 있다. 학교와 집이 있는 Liebefeld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인 베른 구시가지에 대중교통으로 10분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미카일로는 김정은의 집에 갈 때마다 새롭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매우 좋았다고 말했다. 미카일로는 김정은의 집에 갈 때마다 그의 여동생 김여정을 만났고 돌봐주는 어른들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후일 미국으로 망명한 김정은의 이모 고영숙 부부이다. 김정은의 농구사랑은 집에서도 계속됐다고 하며 미카일로는 그와 마이클 조던이 나오는 미국 영화물을 보거나 같이 게임을 즐겼다고 했다. 이외에도 김정은은 이따금씩 스키를 타러 다녔다고 하는데, 마식령 스키장에 큰 공을 들인 걸 보면 스위스 생활이 확실히 큰 영향을 끼친 듯하다.
9학년이 끝날 때쯤 김정은은 북한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미카일로에게 자신이 김정일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한다. 하지만 미카일로는 이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또 믿을 이유도 없었다고 한다.
2013년 김정은은 미카일로의 언론 인터뷰를 보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던 그에게 대사관 직원들을 보내 그를 평양으로 초청한다. 스포트라이트 측에 제공한 자료들에 따르면 미카일로는 2012년 7월 21일부터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했고 김정은을 만나 굉장한 환대를 받았다. 리설주는 물론 김여정도 참여한 식사자리가 있었고 김여정과도 반갑게 재회했다고 한다. 미카일로는 자신이 알던 '박운'이 북한 독재자가 되어서 자신 앞에 서자 어떻게 불러야 할까 잠시 고민도 했지만 그는 하던 대로 그를 '운'으로 불렀고 따뜻한 포옹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김정은 리즈시절. 이후 40kg 이상이 쪄버렸다.
원래 김정은은 초창기에는 별 존재감이 없었다. 일설에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김일성은 김정남을 귀여워했고 김정은은 찬밥 신세였다고. 링크 내용대로라면 김일성은 김정은을 손자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건데, 이 기사가 과장이라고 쳐도 일단 김정은의 친모 고용희가 정실이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므로 신빙성은 높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장남이며 언론 노출과 해외 출입이 잦았고 더불어 나이와 경력이 있던 김정남을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나, 김정남은 정식 결혼이 아니라 원래부터 유부녀와의 불륜의 소산이기 때문에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없었다. 김정은은 후처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정식결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정통 다만 김정일 곁에서 요리를 했던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일찍이 저서를 통해 김정운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을 점쳤다. 동복형 김정철의 경우, "김정일이 '여자아이 같다'는 평가를 내리며 후계자 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출처:후지모토 겐지, 김정일의 요리사, 4장) 후지모토는 김정은이 김정철과 달리 권력욕과 리더십이 있으며 어린 나이부터 부하들을 휘어잡는 능력을 엿보였다고 술회한다.
2010년 1월 8일, 즉 그의 생일, 북한에선 TV에 연간 김일성 생일, 한국전쟁 휴전일, 로동당 창단일로 딱 3번 트는 행사용 노래 <축배를 들자>를 틀었다. 그의 어릴 적 생일 축가로 지어진 노래 <발걸음> 또한 가사를 개사하여 북한 어린이들 사이에서 자주 불러서 여러 가지로 후계자의 윤곽이 확실하다.
2010년 9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전당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청년 시절에 문화예술계(라고는 하지만 선전선동에 매우 중요한 요직이다) 쪽에서 들이대기 시작하면서 10년 넘게 자기 입지를 강화해 나왔던 아버지인 김정일과 달리 북한에서 아무 경력도 없다가 갑자기 띄워주려다 보니 넣을 게 없어서 별 해괴한 선전을 해댄다고 한다. 3살 때부터 백발백중의 사격실력을 갖췄다든가, 140km 이상의 거리를 승용차로 운전했다든가, 7살 이전에 전차 등의 중장비를 조종했다는 양판소, 무협지 수준의 소설이 북한 측의 선전 내용이라고.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한 국가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대국적으로 볼 수 있는 전략적 시야를 갖춘 게 아니고 전차 운전할 줄 알고, 자동차 운전할 줄 알고 사격 잘 하고 해 봐야 별로 의미가 없는 소리다. 그렇게 따지면 대다수 국가에서 가장 지도자에 걸맞는 사람은 정치인이 아니라 특수부대원, 공작원, 정보기관원이 될 것이다. 일국의 지도자에게 걸맞은 능력은 여러 가지가 있기야 하겠다만 적어도 개인의 전투능력이 아니라 한 사회를 제대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 전시 전략적 식견을 가져 자신이 속한 사회의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능력, 다른 국가와의 외교적 마찰을 줄여 속한 사회의 구성원이 세계적으로 활약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 정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인민은 굶기고 외교는 파국으로 이끄는 지도자에게 '권력 유지를 위한 능력' 말고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3살에 운전을 했니 백발백중이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선전은, 반대로 말하면 '그것밖에 선전할 것이 없어서'인 것이다. 차라리 저런 황당한 소리를 선전이라고 할 바에야, 어릴 적부터 북한의 나아갈 길을 걱정한 속 깊은 아이였다거나, 오만한 미국인들을 말빨로 꺾었다거나 하는 소잿거리로 선전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 밖에 김정일이 발에 땀나게 중국과 러시아 등을 오가며 건수를 벌어오면, 북한 내부에서는 "김정은의 공이 컸다"는 식으로 밥을 떠먹여주었단다. 안습.
김정은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듯한 김정일의 모습. 이 당시 아들이 뿌듯하다는 듯이 웃기도 하고, 그야말로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인간적인 표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두 부자가 저지른 만행들을 생각하면 한 편의 호러영화가 따로 없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김정은은 세계 최연소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
2011년 12월 19일, 조선중앙TV의 특별 방송에서도 김정일 추모위원회에서 가장 먼저 이름이 불리면서 권력 서열 1위로 차기 후계자로 낙점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대한민국의 전문가들은 "1994년 당시 김정일의 승계 과정보다 훨씬 불안정하지만 김정일이 구축해놓은 시스템과 중국의 지원으로 체제 붕괴나 내전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김정은의 지지 기반이 미약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집권에 성공하더라도 김정일이 해왔던 1인 절대 독재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요직에 있는 고모 김경희, 고모부 장성택 등의 심복을 중심으로 하는 당의 세력 분포에 따른 집단 지도 체제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이 과정에서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물어 총살형에 처해졌다는 박남기처럼 내부의 권력 투쟁이 격화하면 많은 숙청이 따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예측과는 달리 장성택은 숙청되었으며, 유력한 심복으로 지목되었던 김경희 역시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며 사실상 잠적했다. 이를 통해 김정은이 정권 안정을 이제 자신하고 있다는 예측도 있다.
김정은의 상황을 김정일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김정일은 1970년대 후반에 김일성의 후계자로 결정되면서 20년 가까히 정치 일선에 나섰으며 김일성 말년에는 계승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사실상 실권을 장악했다. 김정은이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은 2~3년에 지나지 않으며 계승은 받았으나 실권을 장악했는지는 모른다. 직책은 로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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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일성-김정일의 직계 혈통'이자 '차기 지도자'로 김정일 생전에 인정받았으니 겉으로 보이는 직책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북한은 혈통이 지배하는 전제 왕국이다.
김정일은 50대의 원숙한 나이였으나 김정은은 30대 초반의 젊은이일 뿐이다. 숙청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북한의 국회라 할 수 있는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에서 김정은보다 어린 사람은 거의 없다. 김정은은 나이 든 간부들을 숙청하려 들 테고, 이 때문에 권력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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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김정일이 생전에 김정은의 경쟁자로 여겨지는 이들을 미리미리 치워놨기 때문에 이점은 있다. 김평일은 해외를 떠돌며 사실상 유배된 상태고, 김정철은 몸이 너무나 병약해서 지도자로서는 부적합한 상태인 데다가 권력에 관심이 없어보인다. 김정남과 장성택은 아예 숙청, 암살되었다. 김정일처럼 확고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딱히 강력한 대항 세력은 없다. 오히려 김정은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최소 몇 십 년은 살 테니 '구심점'이 될 수 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첫 번째 아내 김정숙에게서 태어난 적장자(嫡長子)였으며 이것을 자신의 우월한 혈통성으로 내세우는 데 널리 써먹었다. 반면 김정은의 어머니는 재일교포 무용수 고용희다. 게다가 김정은은 장남은커녕 아들 중에서 막내다. 북한은 겉으로는 공산주의를 내세우고 있음에도 철저하게 혈통의 순수성을 따지고 조선시대 유교 사회처럼 신분을 중시하는 사회다.
따라서 고용희의 신분은 북한에서는 오랑캐 출신의 첩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인지 김정숙과는 달리 고용희는 신격화하지 않고, 존재 자체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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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렇다고 김정일의 다른 자식들이 딱히 혈통 면에서 김정은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김정남의 어머니 성혜림도, 북한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존재는 아니었다. 그리고 고용희의 혈통이 그렇게 걸리면 날조하면 된다. 그런데 모계혈통 같은 건 필요 없다. 김일성 라인이며 김일성 또는 김정일에게 인정받으면 그만이다.
김정일은 후계자 시절에 충분한 홍보 기간이 있었으나 김정은은 몇 년간의 홍보에도 아직 대중에 명확하게 각인된 인물이 아니다. 김정일도 그리 대중에 많이 나서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김정은은 현재까지는 김정일 이상으로 비밀스럽게 움직이며 대중에 나서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물론 북한 정치에서 일반 대중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지만 김정은은 아직 할아버지나 아버지 수준의 카리스마가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김정일이 어느 정도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면서 권력을 잡았다면 김정은에게 있는 것은 진짜로 '조상의 후광'밖에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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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15년 현재 김정은은 안정적으로 승계에 성공했고, 특히 제2권력자로 여겨지던 고모부 장성택을 제거했다. 이제 김정은에게 대항할 만한 인물은 최룡해뿐인데, 그 최룡해마저도 2014년 1월에 김정은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연설을 했다. 게다가 최룡해의 입장에서 보면 김정은에게 대들 여유조차 없다. 당장 황병서가 치고 올라와 최룡해의 라이벌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김일성 숭배'에 익숙한 북한 사람이라도, 난데없이 얼마 전에 나타난 새파란 20대 청년에게 복종하라는 것을 누가 쉽게 받아들이겠는가? 게다가 집권 얼마 전의 북한의 2009년 화폐개혁 같은 실정이 벌어진 탓에 민심이 매우 나빠졌다. 그래도 김정은은 김일성이 살아 생전의 외모와 같은 점에 희망을 걸지만 글쎄? 실제 생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김정은이 북한에서는 1982년생으로 취급하는 것도 1942년생인 김정일과 정확하게 40년, 1912년생인 김일성과 정확하게 70년의 연령차가 난다는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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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김정은은 포상과 처벌을 번갈아가며 남발하고 점점 자리를 잡아간다. 그리고 북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예 "어린 김정은을 계속 내세워야 실권자가 마구 바뀌는 대혼란보다는 낫다"는 판단을 할 확률이 높다. 일례로 새파랗게 어린 김정은이 원로인 장성택을 제거하고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김정일은 어린 시절에는 일반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 이 때문에 최소한의 현실 감각과 정치 감각은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정은은 태어날 때부터 장군가의 인간으로 철저하게 우대를 받고 길러졌기 때문에, 현실 감각과 정치 감각이 제대로일지 의심스럽다. 김정은은 조선의 숙종이나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미츠처럼 날 때부터 지배자인 자이므로 왕조 시대의 인간을 현대에 집어던져 놓은 것과 같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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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체사상 도입 이후 사실상의 절대왕정국가가 된 상황에서 현실 감각을 운운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고 설레발이다. 애초에 북한 사회 자체가 다른 민주주의 사회 내지는 공산주의 사회와는 전혀 다른 형태이기 때문에 딱히 어려울 건 없다.
사망 발표 직후엔 일단은 김정일 장례에 모든 관심이 집중해서 별 탈은 없지만, 장례가 끝나는 순간부터 북한 내 정권들의 존폐 여부에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김정은 초기에 집단 지도 체제 안에서 정권 안정에 변수를 줄 수 있는 건 오극렬이 어떻게 나오는지에 달려있으며, 김정은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이복형 김정남이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른다. 여기에 아버지 김정일의 이복형제인 김평일까지 가세할 수도 있어, 안정적인 승계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정작 북한 내부에서는 김정은의 계승이 순조로운 듯하다. 상중임에도 상당히 빠르게 인사를 정비하는 모습이 보여서다. 대표적으로 25일 군부를 이끌고서 조문을 하는 모습에서 그의 고모부이자 핵심 실세로 예상하는 군부에 아무 직책이 없었던 장성택이 대장 직위를 달고 조문하는 모습이 잡혔다. 이 점은 현재 북한의 실세 장성택이 군부에도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하니 김정은 체제가 군부에도 작용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게 김정일의 생전 지시인지, 아니면 김정은 독단적으로 결정한 행위인지 모르겠지만 후자라면 김정일이 생전 '나와 닮았다'라고 한 발언처럼 김정일만큼의 정치 능력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다.
2012년 4월 11일 열린 제4차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의에서 아버지 김정일을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하고 자신은 조선로동당 총비서 대신 '제1비서'라는 직책을 신설하여 취임해 조선로동당의 당권까지 장악했음을 공식화했다. 아버지 김정일이 김일성의 직책이던 '국가 주석' 자리를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여 폐지시켰던 전철을 그대로 밟은 것. 그리고 4월 13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아버지 김정일을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다시 국방위원장 대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했다니 이뭐병.
아버지를 영원한 총비서로 남겨서 자신이 국방위원장에 취임하나란 추측도 했으나, 국방위원장직 역시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만들어버림에 따라 헌법을 바꿔서 총비서가 아닌 제1비서로서 당 중앙군사위원장에 취임한 것에 비추어보면, 향후 김정은 체제의 북한은 당 중심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2016년 5월 6일 36년 만에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를 개최하였고, 5월 9일 새 직책인 조선로동당 위원장직을 신설하여 여기에 직접 자신이 취임하면서 완전히 당 중심으로 국가운영을 바꿨다.
그리고 2016년 6월 29일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국방위원회를 폐지하고 국무위원회를 신설하고 국무위원장에 추대되었다.
2017년에는 제6차 핵실험을 통해 마침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을 초토화시킨 리틀 보이와 팻 맨을 능가하는 핵무기 개발 및 실험에 성공했고, 이로 인해 대북 제재가 더욱 강화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 몰렸다.
집권 이후 대남 대미 적대 정책으로 일관하다가 180도 돌변하여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2018년 1월 1일, 김정은은 신년사를 발표하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 선수단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며 대화의 손길을 내밀었다.이를 계기로 개회식 당일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과 다음날 친서 전달 등이 이루어지며 남북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2018년 3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특사를 파견했고, 남북정상회담뿐만 아니라 북미정상회담까지도 이어지게 되었다.
2018년 3월 25일부터 3월 28일까지 시진핑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집권 이후 처음으로 태양호를 타고 방중하여 베이징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북중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대한민국과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더불어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나섰으며 북중정상회담을 통해 본격적으로 국제 외교에 자신의 모습을 공식적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2018년 4월 27일에 열린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과 만남을 가지며 판문점 선언이라는 성과를 거둔다. 이때 김정은은 북핵(군사적 성취)보다 자신들의 정권 존립이 더 중요하다는 걸 드러냈고 체제 안전만 보장된다면 언제든지 핵무기는 포기할 수 있다며 미국, 대한민국 등에게 핵무기 포기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2018년 5월 7일부터 5월 8일에 이번에는 참매 1호로 재차 방중하여 시진핑 국가주석과 다롄에서 2차 북중정상회담을 가졌다.
2018년 5월 10일에는 방북한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편을 통해 북한에 억류된 한국계 미국인 3명을 풀어줬다.
2018년 5월 16일 0시 30분에 김정은이 한미 군사훈련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며 고위급회담을 취소했다.
2018년 5월 26일 15시 판문점에서 2018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며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완화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을 가졌다.
6월 19일부터 6월 20일까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을 받아 1박 2일로 참매 1호로 방중하여 시진핑 국가주석과 베이징에서 3차 북중정상회담을 가졌다. 극비리에 이루어진 3월 1차 방중과 5월 2차 방중과는 달리 첫 공식 방중이었다.
2018년 9월 18일부터 9월 20일까지 2박 3일간 평양에서 2018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여기서 9월 평양공동선언이라는 성과를 냈는데 특히 연내 서울 방문 추진이라는 파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2018년 서울 답방은 무산됐지만, 2019년이나 그 이후라도 만약 김정은이 실제로 서울을 방문하게 된다면 북한의 최고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서울을 공식 방문하게 되는 사례가 된다.
2018년 4월 27일에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싶고, 획기적인 경제 개발을 통해 북한을 동아시아의 주요국으로 부상시키겠다는 야심을 내비쳤다고 한다. 실제로 북한이 그동안 베트남식 개혁·개방에 대한 연구 성과를 상당히 축적했다고도 한다.
베트남은 북한, 중국처럼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다. 베트남의 개혁 개방 정책은 '도이머이'(쇄신)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중국처럼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라는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시장을 개방하고 해외 자본을 유치해 시장 경제 자본주의를 접목시킨 정책으로 1986년 응우옌 반 린 서기장이 취임한 후 제6차 공산당대회에서 처음 도입했다. 도이머이 이후 베트남은 연평균 7.6%의 고도 성장을 달성하고 정책 추진 20년 만인 2006년에 세계무역기구에 150번 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이는 일부 지역에 한해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고 거대한 내수를 바탕으로 생산성을 개선시킨 중국식 개혁·개방과는 차이가 있다. 경제적으로는 중국보다 자본에 대한 통제가 덜하고, 정치적으로는 미국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베트남은 이 도이머이 정책을 통해 연평균 경제 성장률 7.6%라는 큰 성공을 거둔 바 있다.
김정은은 김정일과 달리 젊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아본 경험도 있다. 따라서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고립된 세계 최빈국 안에서만 신으로 숭상 받다가 죽는 전철을 밟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선 경제 문제가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김정일과 달리 스위스에서 유학한 김정은은 서유럽의 발전상을 보면서 북한 경제에 서구식 제도를 대거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가까운 중국의 개혁·개방 경험이 있지만 경제 규모나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 등을 감안할 때 북한이 처한 여건이 중국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2000년대 초반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정부의 외교 전문에 따르면 당시 김정일의 후계자 후보로 부상한 김정은은 베트남식 개혁을 선호한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또한 김정은은 중국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 이유는 중국의 내정 간섭 때문으로 장성택, 김정남 등 친중파 숙청의 이유도 이와 관련 있다고 추정된다. 이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견제와 균형을 취하는 줄타기 전략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이는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사이가 소원해졌을 때 양국 간 줄 타기 외교를 하며 실리를 취하려 했던 행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내부적으로는 아버지의 선군정치 덕분에 세력이 비대해진 북한 군부를 반복된 숙청을 통해 약화시키고 길들이는데도 성공한 것 같다. 북한 군부는 우리나라의 안전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동북아 평화와 개혁 개방의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정은은 집권 첫 6년 동안 군부를 통제하는 것에 주력했고 이를 위해 선대에 이어 핵무기 실험을 이어 나갔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이 침공해올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라지만, 내부적으로는 핵무기를 앞세우면 재래식 무기의 발언권이 약해진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김정은이 집권하고 '선군정치의 시대'에서 '선당정치의 시대'로 변하자, 과거 선군정치의 영광과 특혜를 잊지 못하는 일부 군인들의 불만이 있다고 한다. 그간 공포의 대명사였던 북한군의 약탈과 횡포도 눈에 띄게 사라졌다고. 북 소장파 군인, 김정은 ‘선당정치’에 불만, 김정일 '선군정치' vs 김정은 '선당정치'
또한 김정은은 그간 군부가 누려온 각종 특혜를 회수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군부의 불만이 있었지만 큰 갈등으로 치닫지 않았다. 이는 김정은이 그런 반발을 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넘기지 않는 냉엄함을 보여주었기 때문도 있겠지만, 핵무기 개발로 인한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와, 세계 최강국과 1년 내내 얼굴과 총구멍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위기감을 느낀 북한의 엘리트층이 김정은과 운명 공동체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해 권력 승계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 기반을 의식하여, 자신의 고모부이자 정치적 후견인인 장성택과 이복 형 김정남으로 대표되는 친족들을 비롯해 많은 군 장성들을 사소한 사유만으로도 목숨을 빼앗는 공포 정치를 펼쳤고, 그 덕에 후계자 수업이 덜 끝난 상태에서, 그것도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최고 권력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권력 세계를 확실히 휘어 잡은 것 같기는 하다.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도 9만여 명이 직간접 숙청되었다고 전해지는 8월 종파사건이나 2만 5000여 명이 희생된 심화조 사건을 일으키는 등의 무자비한 행보를 보여준 독재자였지만, 김정은처럼 직계 친가족까지 직접 숙청하거나 최고위직의 군 간부들을 며칠 사이에 줄지어 처형하는 등의 행동을 함부로 하진 않았다.
어쨌든 김정은의 무분별 대규모 숙청을 통한 공포 정치는, 그의 정치적 입지가 북한의 건국자인 김일성과, 권좌에 오르기까지 수십 년간을 권력 핵심에서 복무하며 정무 감각을 익히고 세력을 다진 김정일에 비해 비교적 불안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숙청과 처형을 정치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닌, 개인 감정에 근거해 실시하기도 하는 건 아버지 김정일을 닮았다. 국정원에 따르면 김정은이 권력 전면에 나선 2012년 7월 이후 처형된 고위 간부는 100여 명에 달한다. 전술한 국정원의 발표 소스는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2016년에 발간한 『김정은 집권 5년 실정백서』를 인용한 것으로써 국정원 산하 김정은 집권 이후 총살‧처형된 간부들은 2016년 기준 총 140여 명으로 2012년 3명, 2013년 30여 명, 2014년 40여 명, 2015년 60여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김정일 집권 초기에 김정일이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자행한 심화조 사건에서 희생당한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 숫자보다 훨씬 적은 것으로, 오히려 김정일에 비해 권력 획득 과정이 안정적이거나, 큰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는 의견도 있다.
김정은의 첫 표적은 김정일 사망 이후 군부 실세로 꼽히던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이었다. 리영호는 김정일의 죽음이 임박하던 시절, 인민군 총참모장-당 정치국 상무위원-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파격 승진을 했던 인물로, 김정일이 김정은의 사람으로 쓰려고 발탁한 인물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김정은은 2012년 7월 리영호를 ('일신 상의 이유로 모든 보직에서 물러났다'고 표면상 밝혔지만) 해임해 버렸다.
그의 해임은 김정은의 군 통제 강화 과정에서 비협조적 태도를 취한 데 대한 문책성 인사로 알려졌다. 리영호를 포함해 김정일의 장례식 때 영구차를 호위했던 김정각, 김영춘, 우동측 등 ‘군부 4인방’도 김정은 시대 개막 이후 모두 숙청되거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세종연구소와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가 주최한 2018년 4월 18일의 세종국가포럼의 발표에 의하면, 속칭 영구차 호송 7인방이 숙청된 일화는 과장된 면이 있다고 한다. 박근혜정부는 김정은의 잔학성을 강조하기 위해 영구차 호송 7인방이 거의 숙청되었다고 말하여 왔다.
이에 따라 다수 언론들은 “거듭된 숙청으로 김정일 사망 당시 김정은의 후견인으로 점쳐졌던 총참모장 리영호,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등 이른바 ‘운구차 7인방’은 모두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고 주장하면서 ‘운구차 7인방’이 대부분 숙청된 것처럼 왜곡 보도해왔다.
그러나 리영호 총참모장은 과거 군부가 관장하던 외화벌이 사업을 당과 내각으로 이전하는 데 반발하다가 2012년 7월에 해임되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며 김정은은 동년 5월 14일 “군대가 너무 돈 맛을 들였다. 총과 총알은 당과 국가가 만들어 주겠으니 군대는 싸움만 잘 하면 된다”라고도 지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리영호의 해임은 김정은의 1인 지배 체제 강화와는 무관하게 북한 군부를 사정(査正)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숙청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운구차 7인방’ 중 김기남과 최태복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은 2017년 10월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은퇴했는데 당시 그들의 나이는 각기 88세와 87세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퇴장 사유는 단순한 고령 때문일 것이다.
또한 김영춘은 2013년 4월 인민무력부장직에서 해임되었지만 당 중앙위원회 군사부장직을 맡고 있다가 은퇴했으므로 숙청과는 무관하다. 2013년에 김영춘의 나이가 77세였으므로 당시 그의 인민무력부장 해임도 나이에 따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김정각은 2013년 4월 총정치국 제1부국장에서 인민무력부장으로 승진했다가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총장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김정각은 인민무력성 제1부상직으로 다시 이동했다가 2018년에는 인민군 총정치국장이라는 군부 1인자 직책에 잠깐 올랐다가 2018년 5월 평양시 당 위원장을 지냈던 김수길에게 총정치국장 자리를 넘긴 걸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우동측 전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은 2012년 3월 뇌출혈로 쓰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퇴장도 정치적인 숙청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처럼 ‘운구차 7인방’의 운명을 분석해보면 장성택을 제외하고는 김정은의 1인 지배체제 강화를 위해 숙청된 인물은 없다는 것이 세종연구소의 발표 내용이다.
2013년 12월에는 자신의 고모부이자 김정일의 사망 이후 북한 2인자로 군림하던 장성택을 전격 처형,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죄목 중에는 김정은에 대해 ‘왼새끼를 꼬며(딴마음을 먹고)’, 김정은을 추대하는 자리에서 ‘건성건성 박수를 쳤다’는 것도 있었다.
한미 당국이 북한 체제에 커다란 파급력을 낳으며 내부 쿠데타까지 몰고 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장성택의 허망한 죽음이 의외로 그냥저냥 지나가자 북한 체제의 견고함이 상상 이상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의 남편이자, 김정일 정권 시절에는 비록 실각과 복권을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늘 권력 2인자 자리를 놓지 않았던 최고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세종연구소는 세종국가포럼의 발표 내용에서 장성택이 처형된 이유로 '반혁명적인 종파행위'와 '방탕하고 난잡한 여자 관계'를 들고 있다. 여기서 '종파'(宗派)란 '개인이나 분파의 이익을 추구하며 당과 '혁명운동'을 분열·파괴하는 집단'을 가리킨다. 장성택이 김정은에 대한 반란을 꾀했다는 것으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정은은 장성택을 제거할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장성택이 정말로 국가 반역에 해당하는 죄를 저질렀는지는 통일이 되어 관련 자료를 직접 조사해 보지 않는 이상 정확한 내막은 알기 힘들 것이다. 심지어 세종연구소는 복수의 소식통으로부터, 장성택이 처형되는 것을 실제로 본 고위 간부는 없고, 그냥 외부 세계에만 장성택이 '만고의 역적'이었고, 죽은 사람이 됐다고만 발표하고 실제로는 그래도 목숨은 붙여놔서 가택 연금 중이라는 정보를 받았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그러나 현재까지 북한의 발표나 언론의 보도, 국정원의 정보로 볼 때 '공식적으로' 장성택은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2015년 4월에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재판 절차도 없이 대공화기인 고사총으로 공개 처형되면서 김정은의 잔혹성이 국제사회에 다시 한 번 각인됐다. 처형 이유는 ‘김정은이 참석한 행사에서 꾸벅꾸벅 졸았기 때문’이었다.
현영철의 처형 한 달 뒤인 2015년 5월 김정은은 최영건 부총리도 처형했다. 최영건은 김정은이 추진하는 산림녹화정책과 관련해 불만을 표출하고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2월에는 우리 군대의 합참의장에 해당하는 리영길 인민군 총참모장(군부 서열 3위)을 처형했다. 죄목은 ‘종파분자 및 세도·비리’인 것으로 전해졌다. ‘반(反)김정은 파벌을 구축하고 권력 남용 비리를 저질렀다’는 얘기다.
그러나 2016년 5월, 리영길의 생존이 확인되면서 국정원의 잘못된 정보임이 판명났다. 조선일보가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던 이 사람이 떠오른다 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이 10일 보도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1차 전원회의의 인선 내용을 보면, 리영길 전 총참모장이 중앙군사위원,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됐다. 가장 최근인 17년 4월 15일에는 대장으로 진급한 상태다.
2017년 2월, 김정은의 이복 형인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화학무기인 VX 액체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세한 내용은 김정남 피살 사건을 참조. 김정은의 잔혹함을 여지없이 전 세계에 드러내버린 사건이었다. 동시에 왕조 국가에서나 볼 법한 친인척에 대한 숙청을 장성택 숙청에 이어 다시 한 번 보여 준 셈이다. 또한 위험한 화학 물질을 해외의 국제 공항에 살포하여 김정남을 암살함으로써, 엄청난 외교적 결례도 동시에 저지르고 말았다.
한편 세종연구소는 2018년 4월의 발표에서 다수의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즉흥적’인 결정에 의해 김정일 시대보다 더 많은 간부들이 숙청되고 있는 것처럼 주장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2016년에 발간한 『김정은 집권 5년 실정백서』에 따르면, 김정은 집권 이후 총살‧처형된 간부들은 2016년 기준 총 140여 명으로 2012년 3명, 2013년 30여 명, 2014년 40여 명, 2015년 60여 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김일성 사망 후인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약 3년 동안 이른바 심화조 사건을 통해 숙청된 간부들은 아무리 최소로 잡아도 2,000 명 정도로 추산된다. 김정은 집권 이후 140여 명의 간부가 숙청되었다면 그 숫자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김정일 시대 심화조 사건으로 숙청된 간부들의 약 7% 정도에 불과한 수치다.
게다가 '심화조 사건' 때 최대 25,000여 명이 숙청되거나 유배되었다는 주장도 있기에 이 수치와 비교하면 김정은이 숙청한 숫자는 김정일과 비교했을 때 더욱 낮아질 수 있다. 심화조 사건으로 당시 핵심 실세였던 문성술 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본부당 책임비서까지 처형되었으므로 김정일 시대에도 핵심 간부들이 결코 숙청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정부 시기 국정원이 ‘숙청’되었다고 발표한 북한 간부들 중 일부는 마치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보 능력을 비웃듯이 얼마 후 복권되거나 다른 직책으로 이동한 것이 확인되고 있어 실제 숙청 규모는 국정원이 발표한 것보다 훨씬 적을 수 있다. 이는 현송월이나 같은 음악단 단원들, 리영길이 처형당했다는 잘못된 국정원 발 정보가 유통되었다는 것에서 드러나는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김정은의 잔혹성은 선대 지도자들과 비슷하지만, 적어도 숙청의 규모는 김일성이나 김정일보다는 적다는 것이다.
향후, 김정은이 아무리 숙청 숫자가 줄었다 해도 이런 식으로 무자비한 숙청을 계속 이어가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어찌됐든 지나친 잔인함은 반드시 부작용과 반대 급부로 돌아오기 마련이고, 2018년 기준으로 김정은은 북한의 오랜 핵무기 개발로 인해 받고 있는 국제 사회의 각종 경제 및 인적 제재를 돌파하고, 북한 경제를 치유하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시진핑 국가주석 등과 소위 "정상 국가의 수장"으로서 외교를 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자회견 형식으로 선언문까지 냈는데 이는 김정은이 국제 외교 무대에 정식으로 데뷔했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이렇게 되면 인권 문제나 무자비한 숙청 문제에 관한 지적도 정식 외교 무대에서 계속 거론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미국이 원하는 당장의 대가는 북한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모두 없애고, 앞으로도 독단적인 핵무기 개발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과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미국이 입에 담지는 않고 있지만, 후일 북한의 최대 외교적 숙원인 미국과의 정식 수교가 이루어진다면 미국에 의해서 북한내 인권 문제가 충분히 거론될 수 있다. 앞으로 북미 간의 협상과 거래의 결과에 따라서 김정은이 저질러 왔던 인권 탄압과 숙청의 강도는 약화될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
아래는 김정은에 의해 숙청당한 것으로 확인된 인물들의 명단이다.
북한 정권이 김정은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홍보하는 것이 바로 2009년에 북한에서 자체 기술을 확보했다는 컴퓨터 수치제어 공작 기계의 핵심 기술인 CNC(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이다. 북한 언론에서는 이것을 김정은의 치적이라 주장하고, "과학 기술에 능한 지도자"라며 CNC 홍보 노래까지 만들어 북한 주민들에게 전파한다. 해당 노래는 유튜브에서 'CNC Song'으로 검색하면 들어볼 수 있다. 영상 링크
하지만 CNC 기술은 이미 1940년대 말~1950년대에 미국이 개발해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공작 기계의 기본 기능으로 여길 만큼 매우 보편화되었다. 물론 미국이 1940년대 개발했다고 이 기계가 만들기 쉬운 건 절대 아니다. 일본은 1967년, 한국은 1977년이 되어서야 자체적인 CNC 개발에 성공했다. 게다가 이것을 못 만드는 나라도 많은데 굳이 안 만드는 이유는 기술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CNC 공작기계를 수입하는 것이 개발하는 것보다 싸게 먹혀서라고 한다.
어쨌든 이 기술을 2010년에 와서야 '과학 기술의 혁명'이라고 선전하는 것을 보면 북한이 시대에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CNC 절삭가공기계 개발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생산된 제품의 품질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CNC 양산 가공품보다 더 열악할 것이라 예상된다.
탈북자를 사살하라는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 때문인지 2010~2011년에는 대한민국으로 입국하는 탈북자 수가 많이 줄었다. 탈출이 힘드니 포기하는 사람이 늘어난 모양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으로 들어오는 사람 수는 줄었지만, 중국으로 탈북하는 숫자는 여전한 듯. 하지만 중국에 탈북자 체포를 강력하게 요청했고, 중국 공안이 빡세게 잡아 들이고 있어서, 섣불리 대한민국으로 가려는 시도 자체를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탈북자가 중국에 계속 정체되고 있는 상황. 이런 중국 공안의 행태가 계속되자 미 의회기구에서 공개적으로 비판 성명을 내기도 했다. 미 의회기구 "중국, 올들어 탈북자 단속 강화" 비판
사실 김정은 체제에서 탈북자의 수가 줄어든 것은, 단순히 김정은이 잔혹하게 나오는 것뿐만 아니라, 2000년대 후반 들어 탈북하는 인물들의 양상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탈북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북한체제 내에서 생계적 곤란함을 겪는 하위계층 위주었다. 말인즉 이들은 애초에 북한에서도 처치곤란이라 잡아도 이득이랄 게 없으니 다소 널널하게 단속해 왔고,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많은 수가 탈북을 시도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이 그렇다고 대놓고 탈북을 방조하면 자신들의 체제가 실패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니 일단 형식상으로라도 단속은 해왔고, 그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강화가 되자 탈북 과정에도 일정한 비용이 들게 되고, 이러한 비용이 계속 상승하면서 탈북할 수 있는 계층 자체가 점점 한정되게 되었다. 여기에 상기한 대로 김정은의 명령도 있기 때문에, 원 주류 탈북자들인 하위 계층의 탈북은 성공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그 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문제는 이번엔 탈북에 소극적이던 중상위 계층이 탈북에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정치계에 만연한 숙청 등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함과, 더불어 김정은이 도입한 외부 문물의 여파로 이제는 자유 국가들의 문물을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다방면으로 북한의 체제에 염증을 느끼는 내부 분위기가 중상위계층 사이에서 점차 팽배해지면서, 이들이 탈북에 앞장서게 됨으로서 탈북자들의 양상이 크게 변화한 것이다.
실제로 2000년대 후반 이후에 탈북한 인물들 상당수는 북한 내에서 중류 계층 이상에 속하는, 원래 북한 체제에서도 경제적 어려움이 크게 없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탈북했다는 건, 과거처럼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정치·사회적 이유로 탈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해서 '미래가 없는 사회에서는 잘 먹고 잘 살아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 인간의 근본 욕구가 채워지게 될 경우, 다음은 삶의 질을 높이는 것에 눈을 옮긴다. 이것은 역사를 통해 수차례 나타난 사실이다. 당장 대한민국만 해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을 거쳐 먹고 사는 문제가 해소되는 순간부터, 군부독재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처럼 탈북하는 계층이 점차 핵심 성분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북한 체제를 사실상 떠받치고 있는 기반 자체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말 그대로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기둥이라, 이들이 떠나면 북한 당국도 곤란해지기 때문에 단속 강도가 엄격해진 것이다. 실제로 체포되거나 송환되는 탈북자들의 처벌이 오히려 경제사회적 계층이 높은 인물들에 대한 처벌의 강도가 높은 것만 봐도, 탈북자에 대한 북한 정권의 인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흡사 과거의 동독을 보는 것과 같은데, 동독도 초창기에는 은근히 자국민의 탈주를 바라는 편이였다. 당시 탈주자들은 대부분 기반이 미약한 하층민이나 근로능력 저하로 노는 노령층 등 생계적 곤란함을 이유로 탈주하는, 동독 당국에서도 처치곤란한 이들이라, "서독에 떠넘겨 노는 입 좀 줄여 보자"는 심보였기 때문. 실제로 초기에는 서독으로 가는 비자를 쉽게 내주는 등 은근히 부추겼(?)다. 그러다 청년층이나 중산층 등 사회지지기반들이 탈주하기 시작하자, 비자 발급 조건을 까다롭게 올리고 적극적으로 단속에 들어가다가 나온 게 베를린 장벽이다.
김정은의 탈북자에 대한 잔혹한 처벌 명령은, 그가 북한 내의 현 탈북자 상황의 의미와 특성을 아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래 3개 치적 시설들은 나름대로 시설이 고급화되어 있다. 문제는 관광객이 오기에는 교통이 아주 불편하며 무엇보다 이 시설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전기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데 전기 공급부족으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에 굶주리는 인민들을 먹일 돈으로 이런 것들을 짓는다는 것 자체가 해괴한 짓이다.
마식령 스키장
문수 물놀이장
미림 승마구락부
한편 선전 활동 중에서 특이한 점으로, 후계자로 공식 등장해서 집권한 이후 북한 정권에서 김정은의 생일(1월 8일)을 공식적으로 기념, 축하한 사례가 아직 한번도 없다. 1월 8일이 김정은의 생일임이 밝혀진 것도, 데니스 로드맨이 방북해서 농구 경기를 치룬 뒤 북한 매체에서 '원수님(김정은)의 생일을 기념하여 1월 8일 농구 경기를 열었다'라고 공개한 뒤에야 알려진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은 각각 '태양절'(4월 15일)과 '광명성절'(2월 16일)로 부르며 모두 공휴일로 지정하고 거창한 축하 행사를 치루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직 김정은의 나이가 어리고 선대와 같은 반열에 올라서 기념하기엔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기피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 김정일은 아들인 김정은이 자신을 꼭 닮았다며 만족스러워 했다고 한다. 이 항목에 서술된 내용 중에는 후지모토 겐지의 저서를 인용한 부분이 많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의 술회에 따르면 김정은을 처음 만났을 때 김정은은 초등학생 정도 되는 나이였는데 후지모토를 대단히 적개심 어린 눈으로 봤다고 한다. 후지모토가 손을 내밀었는데 바로 잡아주지도 않았고 아버지 김정일이 '정은아, 후지모토 씨야. 악수해야지?' 라고 타이르자 마지못해 손을 잡아주었다고. 후지모토는 개인적으로 "김정은도 분명 반일 교육을 받고 자랐을 테니 자신을 처음 봤을 때 '이놈이 그 말로만 듣던 일본 제국 놈이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그때를 회고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김정철과 김정은은 서로 팀을 꾸려 농구 시합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난 뒤의 모습을 보면 두 형제의 성격 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한다. 형인 김정철은 시합이 끝나면 팀원들에게 "수고했다"면서 격려해 주고 웃으며 마무리 했지만, 김정은은 시합이 끝나도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팀원들을 불러 세워놓고 "동무, 그럴 땐 여기가 아니라 저기다 패스를 해야지!"라면서 꼭 짚고 넘어가는 스타일이었다고.
후지모토는 김정은이 10대 시절에 후지모토와 몰래 담배를 피우면서 넌지시 "우리는 이렇게 재밌게 사는데 우리나라 인민들은 어떻게 살까?"라면서 북한 주민들의 실생활에 관심을 표현한 적이 있다고 한다. 후지모토는 이때 김정은이 고작 지금의 중학생 정도 되는 나이였는데도 불구하고 일반 주민들의 삶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제법 인상 깊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참배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애육원에서 고아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실제로 성격이 약한 편이라는 말도 있고, 연기라는 말도 있다.
'여색(女色)'에 대해선 주장이 엇갈린다. 김정일처럼 똑같이 기쁨조와 같은 미녀들을 뽑아서 즐긴다는 주장도 있지만, 반대로 기존의 기쁨조를 해체하고 비서나 별장 관리 등의 업무를 모두 남자 직원에게 맡겼다는 분석도 있다. 한편 아내인 리설주와는 공식 석상에 함께 등장하는 모습이 매우 자주 나와서 단순히 권력자의 아내가 아니라 마치 공식적인 '퍼스트 레이디'의 위치를 마련해주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정일의 아내들이 단순히 가정 내에서 내조만 하거나 비서 수준으로 김정일을 보좌한 정도에 머문 것과는 대조적이다.
태영호 공사의 저서인 '3층 서기실의 암호'에 따르면 김정은의 성격은 매우 포악하고 잔인하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2018년 4월 정상회담 뒤 언론과 온라인에서 김정은에 대한 찬양 일색의 인물평이 나왔지만 김정은은 고모부를 대공 기관총으로 처형한 것과 형인 김정남을 암살했다는 것을 대중들이 잊고 있다고 말하며 여러 일화들을 서술해 놓았다. 책에 의하면 7월 27일은 휴전협정일이지만 북한에서는 전승절로 기념하고 있는데, 2013년 7월 재개관을 앞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전쟁기념관)에 화재가 발생했다. 보고를 받은 김정은이 부리나케 달려와 아직도 물바다인 지하에 구둣발로 들어가더니, 수백 명이 진화와 정리 작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김정은은 “내가 그렇게 불조심하라고 했는데 주의 안 하고 무엇을 했느냐”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쌍욕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p.518)
2015년 5월에는 김정은이 자라양식공장을 ‘현지지도’했었는데, 공장에 있던 새끼 자라가 거의 죽어 있었다. 김정은이 이유를 묻자 공장 지배인은 전기와 사료 부족을 이유로 들었으나 김정은은 “전기, 사료, 설비 문제 때문에 생산을 정상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넋두리”라고 심하게 질책했다. 김정은을 수행하던 고위 간부들도 고개를 떨군 채 그의 지시를 받아쓰기에만 급급했고, 돌아오는 차에 오르면서 김정은은 지배인 처형을 지시했다. 이후 지배인은 즉각 총살되었다.
한편 2016년 대통령 당선 이전 "김정은과 대화할 수도 있다"라는 트럼프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APTN 특파원의 질문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양형섭 부위원장은 “우리는 대화 자체는 반대하지 않는다. 대화는 전쟁 때도 한다. 대화 못할 이유는 없다”고 했다. 외무성이 사전에 작성해 준 원고대로 ‘우리는 언제나 대화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다. 그러자 김정은은 야밤에 외무성 김계관 1부상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질책했다. “야, 그 늙은이(양형섭)가 어떻게 내 승인도 없이 트럼프와 대화에 임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를 대표해서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줬는가. 나는 조선의 지도자이고 트럼프는 대통령도 안 된 후보인데 같은 급이 아니다. 외무성이 그 늙은이한테 그리 말하라고 써줬는가.” 양형섭은 1925년 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일성의 사촌 매부다. 그런 인물을 김정은은 ‘늙은이’라고 칭하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과거의 시스템을 답습하는 수준이나마) 최소한 정권을 유지할 만한 능력은 있다는 평가도 있다. 먼저 1년 만에 자신의 지도력을 해칠 만한 노련한 군부실세인 리영호를 숙청하며 군부를 휘어잡고, 별 혼란 없이 당과 장악하는 면을 봐서는 아예 권력장악에 숙맥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장성택을 처형한 뒤, 대규모 체제이탈 망명사태가 벌어지고, 숙청이 벌어지리라는 예상이나 보도가 이어졌고 4월의 당직·내각개편에서도 장성택 잔당 숙청 및 물갈이가 예상되었으나, 도리어 장성택의 심복이라며 숙청설이 나돌았던 여러 인물들(예를 들어 강석주)이 유임되었고 내각도 급격한 변화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민심의 불만도 교묘히 컨트롤하는 노회한 모습도 있는데, 2013년에는 2012년에 대규모 수해로 식량난이 극히 악화해 특히 봄철의 보릿고개에 인민의 불만이 폭발, 김정은 체제가 흔들릴 것이라는 예상이 돌았다. 그러나 2013년 김정은은 고난의 행군으로 수십만을 굶겨 죽였던 김정일과는 달리 신성불가침이었던 군량미를 대규모로 풀어서 인민의 불만을 교묘히 넘겼다. 뿐만 아니라 2013년 초의 박봉주의 시장 개혁조치가 일단 성공적이라 평가받고 식량 생산이 크게 늘었으며, 중국에 헐값으로 자원을 넘긴 뒤에 받아온 외화로 비료를 대규모로 수입하는 등, 김정일처럼 산을 깎는 다락밭 개간 같은 뻘짓 없이 합리적으로 식량 증산에도 힘쓰는 등의 모습이다. 일단 미국의 평가로도 "식량난은 10년 후에는 거의 극복할 것"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김정은이 먹고 사는 문제를 나름 신경 쓰는 것 같다. 미 농무부 "북한 식량 사정 점차 개선"
북한이 사실상 신정 일치 국가인 만큼 내부적으로는 김씨 일가를 대체할 만한 인물이나 세력이 없고, 외국에서 오래 생활해봤으니 세상 물정에도 그리 어둡지는 않으리라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식량 증산은 아비보다 제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법을 쓰고 있는 듯하다. 1994년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처음 정권을 잡았을 때 많은 북한 전문가들이 3년 안에 쫓겨나리라고 했지만 되려 죽을 때까지 권좌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김정은도 정권을 처음 10년 정도만 안정적으로 유지하면 선조들처럼 종신 집권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최근 김정은 치하에서 장마당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신흥 부유 세력인 돈주들이 수십만 명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북한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이었던 15년을 제외한 2012~2016년까지 연평균 1.2%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다. 특히 2016년에는 제재에도 불구하고 3.9%가 성장했다. 이는 김정은이 대외적으로는 대중무역을 확대하고 대내적으로는 시장 경제를 일정 부분 허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김정은은 집권 초기인 2012년 6월 '우리 식의 새로운 경제관리체계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방침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소유를 확고히 고수하면서 국가의 통일적 지도 밑에 모든 기업체들이 경영 활동을 독자적으로 창발적으로 해나가자"고 강조하였는데 이는 생산수단은 사회가 소유하고 중앙집권적인 경제 계획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경제 체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인이나 기업의 자율성을 조금 늘려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농업 분야에서 초과생산분은 개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공업 분야에도 개인의 투자를 허용하였다. 농업 부문에서는 협동농장의 생산단위 규모를 기존 10명~25명에서 세분하여 3~5명으로 축소했고 해당 생산단위가 일정 규모의 경지를 담당하도록 하는 '포전담당책임제'를 도입했다. 또 목표량을 초과한 생산물은 전량 농민들이 가져가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하는 등 인센티브를 도입했다. 공업 부문에서는 공장·기업소에 경영상의 자율권을 부여했고 개인의 투자를 통한 경영 참여를 허용했다. 전문가들은 계획 수립 단계에서부터 생산, 제품 판매(처분) 및 수익 처분에 이르기까지 기업 활동의 전 과정에서 기업의 권한을 확대하는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출처 이 모든 과정에서 신흥 부유층인 돈주들이 등장하여 달러를 축적하였으며 축적한 달러가 시장에 재투자되고, 그럼으로써 장마당 경제가 다시 활성화되는 선순환 구조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 돈주들은 유통업이나 건설업, 심지어는 광산 채굴업에도 투자를 하고 있다. 이렇게 성장한 비공식 사경제가 북한주민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을 올리고 있으며 김정은 정권의 명줄을 유지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 외에도 13개 경제특구를 개설하여 외자 유치를 노리고, 일부 경공업 소비재에 한해서 품질 개선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등, 적어도 경제 면에서는 김정은은 나름 성과를 올리고 있다.
2018년 기준으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 경제가 나아지고 있다는 언론 보도는 거의 없었으나,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서 북한의 실상이 차차 알려지는 중이다. 통일 연구원 소속 박영자 박사에 의하면 김정은은 김일성만은 못해도 적어도 이런 경제 성장으로 인해, 김정일보다는 지지를 더 많이 받고 있으며, 특히 젊은 층에게 더 큰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김정은 대에 부를 축적한 신흥 돈주들도 김정은과 유착관계를 맺으면서 지지하고 있는 모양새다. 김정은의 통치력에 대한 부정론에서 주장하는 대로, 적어도 경제면에서는 김정은이 "과거의 시스템을 바꿀 생각은 거의 없고 현상유지에 만족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라고 볼 수는 없다. 김정일이 북한 경제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장마당을 탄압한 것과는 달리, 김정은은 장마당을 대대적으로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김정은이 소양있고 성숙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8년 북미 정상 회담이후 "김정은은 매우 훌륭하고 똑똑한 협상가"라고 극찬했다. 스포츠 경향 2018년 10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은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했을 정도.
무엇보다, 미국과의 대화 과정에서 기존의 입장을 선뜻 뒤집지는 않을지언정 판까지 깨려고 무모한 도발을 감행하는건 자제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파 중 하나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이 협상 과정에서 방해가 된다는 불만을 내세우면서 정작 그 당사자를 직접 평양으로 보내라는 친서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냈을 정도. 자신을 거슬리게 하는 마이크 폼페이오를 직접 만나겠다면서 대화를 이어가려는 의지를 보인건 확실히 그렇게 꽉 막힌 인물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특히 그렇게 만나서 "CIA가 나를 암살하려 시도해온 것을 사과하라."는 말을 한데 대해 마이크 폼페이오가 "(우리는) 지금도 당신을 암살하려 하고 있다."는 독설로 되받아치자 도리어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회담한 것을 보면 더더욱.
부정론에선 여전히 북한 주민의 40%인 1000만 명이 영양실조인 것을 비판 골자로 내세우긴 하는데, 사실 이건 제재를 얻어맞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기도 하고, 뭣보다 그 제재를 만든것은 전관이었던 김정일이 선군정치 표방함과 동시에 핵하고 미사일 만들어서 그런거라, 이걸 전부다 김정은 책임으로 떠넘기는 건 다소 억울한 감도 있다. 그나마 김정은 들어서 선군정치 때려치우고 경제에 집중해서 그나마 저 숫자가 줄어들었다고 볼수 있다. 김정일 때는 고난의 행군이라 하여 몇십만명이 아사했고, 그 와중에 김정일은 온갖 사치를 부리며 기근의 피해를 더 늘렸다.
사람 먹을 물도 없는데 자라 공장에서 자라를 키워내라 하는 등 얼토당토하지 않는 명령을 내리고, 명령만 하면 뚝딱 만들어내는 양 생각하는 것을 보면, 세상 물정에 밝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여기에 인민에 대한 실질적인 연결성을 가진 농장과 같은 농업 관련 시설로 주로 현지지도를 나갔던 김일성과 김정일과는 달리, 김정은은 인민의 실생활과는 전혀 관계 없는 관광지 또는 사치성 시설에 대한 현지시찰이 대부분이라는 점에도 차이가 난다.
할아버지인 김일성과 아버지였던 김정일의 능력에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아버지였던 김정일의 개막장처신이 그 첫 번째 이유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여성편력으로 인해 후계자 선정을 어렵게 만든 것은 자업자득인 셈이다. 당장 김씨 가문의 우상화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백두혈통을 내세울 근거를 빼앗아버림으로써 명분면에서도 약했다.
더구나 1980년대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아와 논란은 많았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후계자로 임명받을 수 있었던 김정일과는 달리 김정은은 후계자 수업도 받은 일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건강 악화로 인해 갑작스럽게 지명된 처지라 권력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었으며, 여기에 결정타는 해외에서 자랐다는 약점이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약한 통치 기반은 할아버지 김일성의 이미지를 힘입는 소위 호가호위식 정치권력으로 인해 상당한 제한을 받게 되었고, 자신의 독창적 정치스타일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 인민생활향상이랍시고 내세웠던 정책들이 오히려 북한 주민들의 현실적 필요성을 외면한 정책들이 대부분이어서, 오히려 괴리감만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에 결정타는, 외교 정책에 있어서 거의 공기와 같이 존재감이 없다 보니 더더욱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1. 김정일 자신의 잘못된 처신과 후계자 선정에 대한 소홀함 2. 김정은 자신의 권력기반 결핍, 그리고 이미지 구축실패와 이에 따른 정책의 독창성 등이 김정은의 통치 능력이 없다고 할 만큼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집권 이후 줄곧 김일성과 김정일이 했던 국내 통치 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평안도 지역에만 인프라를 올인하고 민심을 신경 쓰고 공포정치와 널뛰기하는 인사조치까지 똑같다. 이 정도만으로는 개인의 능력을 알 수 없지만 일단 과거의 시스템을 바꿀 생각은 거의 없고 현상유지에 만족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이득을 얻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도 김정일 시절보다 험악해졌는데, 최소한 김일성·김정일 라인까지는 중국을 지나치게 자극하면서까지 통제를 무시하려는 듯한 행동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3차 핵실험은 중국에게도 상당한 위협감을 주며 그 사이에도 김정은이 조용조용 지내려는 중국의 의도와는 반대로 나가니,일반 중국인부터 중국 공산당 수뇌부까지 북한에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당장 북한의 전혀 가망없는 경제 상황은 중국 정부로서도 골칫거리다. 원조를 한다고는 하지만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도 않고, 계속 악화되는 경제난으로 인해 북한 주민의 탈북이 늘어남으로서 이들의 처리도 고민해야 할 처지다. 물론 지금까지는 체포해서 다시 북한으로 넘기지만, 언제까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이렇게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툭하면 도발로 나오는 북한의 태도 역시 중국의 인내심을 점점 한계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문제다.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극도의 긴장 상태를 만들어냈다. 대한민국이야 정권 교체와 함께 대북정책이 강경하게 변했다고 해도, 과거 대북지원을 받던 시절에서 10년도 안 지났는데 마치 그런 시절이 없었던 것처럼 호전적인 태도로 돌변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민간인의 생명까지 뺏는 무력도발까지 감행했다. 그나마 북한을 현상유지시키는 통치력을 그나마 능력이라고 과장해서 평가해도 외교능력에 있어서는 도저히 능력이 있다고 볼 수가 없다. UN 상임이사국이라는 위치를 가지고 있는 중국의 현재의 형편상 북한을 언제나 감싸고 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다못해 미국까지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나와 줄 것을 중국에 요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북한을 그대로 버려두기에는 북한의 붕괴는 중국에게도 심각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현재로서는 북한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대화로서의 협상' 또는 '기권'이라는 형태로서 대응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전 세계를 상대로 어그로를 유발하는 북한의 행태를 계속 이런 식으로 대응할 경우, 국제사회가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부정적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중국이 상당히 곤란한 형편에 놓인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2014년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그동안 중국과 삐걱대던 외교관계의 결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북한 3차 핵실험 이후 북·중 경제협력사업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급기야 중국이 북한의 항구를 빌려 동해를 통한 물류 통로를 개척하려던 계획을 수정해 러시아의 항구를 이용하려 하고 있다.
대규모 투자를 해봤자 북한이 지금처럼 호전적인 태도를 유지하면 전쟁이 일어나 투자회수를 못할 위험이 높은 데다가 도저히 통제도 안되고 예측도 안 되는 북한보다는 차라리 러시아가 낫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2000년대 북한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던 중국 기업들은 비참할 정도로 열악한 인프라와 북한 정부의 이해할 수 없는 정책 때문에 하나 둘 등을 돌리고 있다. 돈 떼먹히는 게 기본이었고, 감시까지 하면서 송금도 제대로 못 하게 막았다고 하니, 중국 기업들의 신뢰를 얻지 못함은 당연하다.
정확히 말하면 통치 스타일은 비슷하나, 정치 능력은 할아버지나 아버지보다 훨씬 떨어지는 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김일성은 빨치산 항일무장투쟁 활동을 하며 조직을 운영하는 방법을 알았고, 김정일은 1970년대부터 정치에 나서기 시작했고 김일성이 죽은 1994년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정치인으로서 활동하며 나름의 내공을 쌓았다. 그러나 김정은은... 2010년에 갑툭튀해서 정치감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2011년 겨울, 최고지도자가 된다. 그래서 무식하게 고모부 장성택까지 죽이며 공포 정치로 자신의 정치력을 포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포 정치 역시 김정은의 자충수로 돌아오고 있는 실정이라는 게 문제가 되고 있다. 현 북한 주민은 할아버지, 아버지 때와 같은 충성심은 많이 희석된 편이고, 간부들 역시 계속되는 공포 정치로 인해 보신주의가 강해지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
심지어 일부 간부들은 탈북까지 고려하고 있다. 하다못해 해외주재 북한공관원들은 본국으로의 소환도 거부할 정도이니 말 다한 것이다. 이는 2015년 4월 말에 일어난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의 숙청으로 그 정점을 찍었는데, 심지어 현영철은 김정은 자신이 직접 임명한 인사였음에도 숙청시켰으니, 다른 일반 간부들의 속내는 더 다른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긍정론에 서술된 식량사정 등의 민생 개선도 말 뿐이고 실상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18년 10월 9일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은 보고서를 통해 북한 주민의 40%가량에 해당하는 1000만명 가량이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있다고 경고했다.유엔 “북한 인구 40% 여전히 영양실조”
김정은은 직설적이면서 돌직구를 날리는 발언이 특징이다. 그러면서 연설에서는 무력을 통한 적화통일, 체제유지, 보장 같은 의미는 항상 내포하는 편이다. 그나마 2018년 이후 무력통일 드립은 사라졌다.
한치의 드팀도, 한 걸음의 양보도 없이 오직 수령님, 장군님식으로 무조건 끝까지 강행하자.
- 태양절을 맞아 처음으로 공개한 육성이 담긴 공식연설 中
2015년 조선반도 남반부 공화국을 무력 통일하기 위한 통일대전을 준비하라.
조선 혁명 완수를 위해 적들과 총결사전을 벌이자.
미제와 어떤 형태의 전쟁도 가능하다.
- 2015 열병식 육성연설 중 나온 연설 중 일부
조국 통일 대전, 생각보다 앞당겨질 것.
공장이 어떻게 이렇게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나, 위대한 장군님의 업적을 말아먹고 있다.
- 2014년 공장 시찰 도중
침략적인 외세와 야합하여 동족을 반대하는 핵 전쟁 연습에 매달리는것은 스스로 화를 불러오는 위험천만한 행위입니다.
경제 건설의 성과는 인민 생활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북조선, 청년 강국으로서 세계적 위상을 떨쳤다.
담력과 배짱이 영웅남아답다. (중략) 3살 때 총을 쏘았고, 3초 내에 10발의 총탄을 쏘아 목표를 다 명중시키며 목표를 100% 통구멍낸다. (중략) 3살 때부터 운전을 시작해, 8살도 되기 전엔 굽이와 경사지가 많은 비포장도로를 몰고 질주했다. (중략) 초고속보트를 시속 200km로 몰아, 외국 보트회사 시험운전사를 2번이나 이겼다 ... (중략) ...
-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 혁명활동 교수 참고서 '비범한 천품' 항목 中...
장군님의 넓은 도량이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 2016년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 연설 中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를 반드시, 반드시 불로 다스릴 것이다.
-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북한 완전 파괴 발언에 반발하며 나온 성명 中
새로운 력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력사의 출발점에서.
-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시작을 앞두고 평화의 집 방명록에 남긴 글.
오기 전에 보니까 오늘 저녁의 만찬 음식 가지고 많이 이야기들을 하던데, 어렵사리 평양에서부터 평양냉면을 가져왔습니다. 가져왔는데, 대통령께서 좀 편한 마음으로 평양냉면, 이렇게 멀리 온, 멀다고 말하면 안 되갓구나... 좀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오전 회의 모두발언 중 일부
조선반도를 핵무기도, 핵 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기로 확약하였습니다.
- 9월 평양공동선언 발표 기자회견 중
그런 의지가 없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 2019년 북미정상회담 중 '비핵화 준비가 되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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