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호 충무(忠武)
군호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본관 덕수(德水)
휘 순신(舜臣)
자 여해(汝諧)[3]
호 기계(器溪), 덕암(德巖)
국적 조선
출생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 8일) 조선 한성부 건천동
(현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8길 19(인현동1가))
사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향년 53세) 조선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
직업 군인
학력
무과 식년시 병과 급제 (1576)
이순신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을 통솔했던 제독이자 구국영웅으로, 자는 여해(汝諧)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한국사에서 독보적으로 유명한 군인이자 성웅이란 칭호가 따로 붙을 정도로 가장 드높은 영웅이며, 무장 이외에 역사적 인물 전체로 넓혀도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한 인간으로서도 희대의 걸물이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내이다. 그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을 이끌고 해상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북상을 저지하였는데, 전쟁 내내 적과 싸워 모든 전투에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항상 승전을 거두었지만, 당시 임금인 선조와 조정에게 지원은커녕 불합리한 모함과 추궁만 당하였다. 끝까지 임금에게 닿지 않을 충심과 함께 온 힘을 다했으나,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지속적으로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꼽힌다. 이순신은 현대 한국에서 성웅, 명장, 군신이라는 최고급 수사들이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한국사 양대 위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며,한국에서 전무후무한 성웅이라는 호칭은 오직 이순신에게만 사용되고 있다.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받은 칭호지만,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이순신 전용 시호로 인식된다.
사실 이순신이 이토록 위대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의 군사적인 위업을 떠나서 보통 사람으로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성인(聖人)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혹하고 거대한 형태의 폭력인 전쟁이라는 상황을 수행하며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감당하였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여러 사람들의 질시와 모함을 받아 파면당하고, 관리로서 받은 조정의 비합리적인 처우 등 앞으로는 왜적과 싸우며 뒤로는 조정과 임금이라는 내부의 적과 맞서 홀로 버텼다. 또한, 어머니와 아들까지 연이어 전시에 잃고 설상가상 자신이 모든 걸 쏟아부어 육성한 정예군이 거의 궤멸수준으로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다시 일어나,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수 십배의 적군에 맞서 출전이 곧 죽음임이 확실시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싸워 결국 이겼으며, 천재적인 능력과 노력을 발휘하여 임진왜란 당시 존망의 위기에 빠진 조국과 백성을 끝끝내 지켜냈다. 이순신은 이처럼 자신이 처한 참담한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이상과 펼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보여준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웃음이 적고 행동이 단아했으며, 좌절과 포기를 모른 채 자신의 사명에만 충실하여 전장에서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탐관오리들이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자 높으신 분들과 뇌물을 주고받는 등의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무관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원리원칙적인 성향과 굉장히 청렴한 성격 탓에 당시 상사들과 갈등이 많아 전쟁(임진왜란) 전에는 인사이동이 자주 있어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다. 이순신은 사람이 갈망하는 권위, 권력 같은 원초적인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신념으로 매사에 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장에서 싸우다 죽던 순간까지 그 누구의 인정과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헌신하였으며,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걸 이뤄낸 건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 가령 명량 해전의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두 시간 가량, 이순신은 대장선 한 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기에 때맞춰 등장하여 경이로운 활약상을 남긴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하겠다. 만약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선은 일본에게 순식간에 먹혔을 것이고, 이후 명과 일본의 땅 따먹기 전면전으로 조선은 말 그대로 가루가 됐을 것이다. 는 좀 비약적인 추측이다. 전국시대 전쟁하듯이 정신없이 수도로 치고 들어오는데만 집중하느라 후방이 불안해져 보급이 힘들었고 너무 높은 세율로 인해 각 점령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등 일본의 실책 또한 심했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이 그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격파가 하루 동안 대여섯 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 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뿐이었다.
또한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 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 한 번뿐이었다. 원균이 5천 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에서조차 사후 연구와 숭배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1545년(1세) 인종 1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1565년(21세) 명종 20년
이즈음에 방진의 딸인 방수진과 결혼. 그 전년도였을 수도 있다.
1573년(29세) 선조 6년
훈련원 별과에 응시, 낙마(落馬)해서 탈락하다.
1576년(32세) 선조 9년
2월: 식년시 무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
12월: 종9품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으로 부임하다.
1579년(35세) 선조 12년
2월: 종8품 한성훈련원 봉사로 재직.
10월: 충청도 병마 절도사 군관이 되어 충청도 해미 병영으로 가다.
1580년(36세) 선조 13년
둘째 형 이요신이 죽다.
7월: 전라 좌수영 관내 발포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종4품 이상의 무관부터 장군)로 전근, 서익이 불러 부당 인사를 제안하나 일언지하에 거절함.
1582년(38세) 선조 15년
1월: 군기경차관으로 온 서익이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근무 태만이라 거짓 보고를 올려 발포 수군 만호 직에서 파직되다.
5월: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다.
1583년(39세) 선조 16년
7월: 함경도 남병사 이용이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삼다.
8월: 여진족 토벌의 공을 세워 종7품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하다.
10월: 경원 고을 건원보의 권관으로 자리를 옮기다.
11월 15일: 부친 이정이 74세의 나이로 별세하다.
1584년(40세) 선조 17년
1월: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잠시 벼슬을 떠나 삼년상을 치른다.
1586년(42세) 선조 19년
1월: 복직하여 사복시 주부(종6품)가 되다.
2월: 종4품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종4품 이상의 장군직)로 임명되다.
1587년(43세) 선조 20년
1월: 맏형이었던 이희신이 사망하다.
8월: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도 겸직하다.
10월: 녹둔도 전투 발발. 이순신이 이일 측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으나 거절, 그리고 전투 후 북병사 이일의 모함으로 1차 백의종군 처벌이 내려지다.
1588년(44세) 선조 21년
1월: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에 참가, 공을 세워 사면되어 백의종군 해제.
6월: 아산으로 내려가다.
1589년(45세) 선조 22년
1월: 비변사에서 불차채용을 하게 되자 이산해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다.
2월: 이광의 추천으로 전라도 감사 휘하 조방장에 임명되다.
11월: 선전관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가다.
12월: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이 되다.
1590년(46세) 선조 23년
7월: 류성룡이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천거했으나 사간원의 반대로 개정되다.
8월: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로 천거되었으나, 역시 사간원에서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개정되다.
1591년(47세) 선조 24년
2월 13일: 이억기, 이천, 양응지와 함께 이순신을 남해 요해지로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선조의 전교를 받았고, 이전처럼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 전에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초수(超授)하다.
1592년(48세) 선조 25년
4월 12일: 거북선(귀선) 건조를 완료하다.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다.
4월 15일: 전쟁 발발 소식을 고지 받다.
5월 4일: 전라 좌수군의 1차 출동.
5월 7일: 옥포와 합포에서 승리로 거두다.
5월 8일: 적진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5월 : 종2품하계 가선대부로 가자되다.
5월 29일: 전라 좌수군의 2차 출동. 사천 앞바다에서 승리로 거두다. 이때 이순신이 총상을 입었다. 거북선을 실전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다.
6월 2일: 당포 앞바다에서 승리를 거두다.
6월 5일: 당항포에서 첫번째 승리를 거두다.
6월 7일: 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6월 : 정2품하계 자헌대부로 가자되다.
7월 6일: 전라 좌수군의 3차 출동.
7월 8일: 한산도에서 승리를 거두다.
7월 10일: 안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7월 : 정2품상계 정헌대부로 가자되다.
8월 24일: 전라좌수군의 4차 출동.
8월 29일: 장림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9월 1일: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1593년(49세) 선조 26년
2월 6일: 전라 좌수군의 5차 출동.
2월 10일: 웅포로 진격하다.
3월 6일: 웅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5월 2일: 웅포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두다.
7월 15일: 전라 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이주하다.
8월 15일: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다.
1594년(50세) 선조 27년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의 6번째 출동.
3월 4일: 당항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9월 29일: 장문포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두다.
10월 1일: 영등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10월 4일: 장문포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두다.
1597년(53세) 선조 30년
2월 6일: 선조가 이순신의 파직을 명하다.
2월 10일: 부산포로 출정해 무력 시위를 벌이고 돌아오다.
2월 25일: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다.
2월 26일: 후임 삼도 수군 통제사인 원균에게 인계 후 서울로 압송당하다.
3월 4일: 감옥에 갇히다.
4월 1일: 옥중 생활을 마치고 나오다.
4월 2일: 류성룡을 만난 후,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지시 받고 내려가던 도중 아산에 들러 잠시 머물다.
4월 11일: 어머니가 별세하다.
4월 13일: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접하다.
7월 23일: 이조판서 이항복, 경림군 김명원의 건의로 이순신이 종2품 삼도 수군 통제사에 복직하다.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수군을 폐하라는 지시를 전하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남아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올리며 수군의 폐지를 반대하다.
8월 18일: 경상 우수사 배설로부터 전선 12척을 인계받다.
8월 28일: 어란진에서 왜선 8척과 조우, 교전 끝에 승리를 거두다.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기다.
9월 2일: 배설이 도주하다.
9월 16일: 전선 13척과 피난선에 힘입어 명량(鳴梁)입구인 임하도의 좁은 목(우수영 앞바다)을 이용하여 일본군 133척과 맞서 싸워 승리하다.
10월 14일: 셋째 아들 이면의 전사 소식을 듣다.
10월 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기다.
1598년(54세) 선조 31년
2월 17일: 고금도로 이진하여, 새로운 통제영으로 삼다.
7월 19일: 절이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9월 20일: 명군과 합류해 장도에서 승리를 거두다.
10월 7일: 명군과 합류해 왜교성에서 전투를 진행하였으나, 명군의 무리한 전술로 소득을 얻지 못하고 물러나다.
11월 19일: 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요격하던 중 관음포에서 총탄에 맞아 전사하다.
1604년 선조 37년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이후 좌의정에 추증되다.
1643년 인조 21년
충무라는 시호를 받다.
1706년 숙종 32년
충청도 유생들의 상소로 사당 건립을 윤허받다.
1707년 숙종 33년
숙종이 친히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하사하다.
1793년 정조 17년
영의정으로 추증되다.
본관은 덕수 이씨로서, 고려 때의 중랑장 이돈수(李敦守)의 12세손이자 조선 초의 영중추부사였던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아버지 이정(李貞)은 부인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네 아들을 두었는데, 신(臣)을 돌림자로 중국 고대의 성인인 복희, 제요, 제순, 대우 임금의 이름을 차례대로 붙여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이라 지었다. 할아버지 이백록이 태몽에 나타나 이름을 '순'이라 지으라고 했다는 설화도 있지만,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설화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덕수 이씨는 문반에 가까웠는데, 할아버지가 기묘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집안이 무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낭설이 퍼져 있지만 기록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덕수 이씨는 오늘날 한국 기준 인구 4만 명 정도의 적은 성씨치고는 파가 굉장히 많고 저마다 특색이 달랐다. 그 점을 무시하고 이이나 이식 같은 유명 인사 몇 명만 떠올리고 멋대로 문반 명문으로 결론짓고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일 뿐이다.
기록상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李百祿)은 사림파에 속하기는 했지만 기묘사화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그 이후 기록에도 등장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백록은 기묘사화 이후에 관직에 진출했다. 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어느 순간부터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다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고 다닌다고 파직되었다거나, 중종의 국상 기간에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벌였다는 좋지 않은 기록이기는 하지만 당연히 그것으로 사형당하지는 않았다. 명종 3년에는 아들을 혼인시키기는 했지만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이백록이 아닌 이준으로 이백록은 무고하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집안 자체도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으며, 애초에 역적 집안 출신이면 무과고 잡과고 간에 과거 응시를 못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의 가문인데,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은 당시 멸문지화를 간신히 면해 후에 성종 때에 가문의 죄에 연좌되는 것을 면하고 이름까지 받았으나, 이후로도 박팽년의 자손들은 조상이 뒤집어쓴 역적의 오명을 벗기 전까진 과거 응시를 할 수 없어서 꽤 근래까지도 곤궁하게 살아야 했다.
또한 기묘사화에 연루됐던 사람들은 선조 1년에 신원되어, 오히려 기묘사화에 연루된 이들을 기묘제현(己卯諸賢)이라 부르며 그것이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조광조와 같이 사사되었던 김식의 증손자 김육(金堉)은 오히려 이로 말미암아 조정 대신 중에서도 산림과 대등한 인물로 여겨졌고 재상에 왕실과 인척까지 맺게 되었다. 그전부터 사림들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사람들을 동정적으로 보았고, 훈구 권신들에게 청렴한 선비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으로 여기는 여론이 강했으니 일이 이렇게 풀린 것이다. 여담으로 위의 김육이 기묘사화와 관련된 선비들의 전기를 집성한 기묘록(己卯錄)에는 이백록도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본편도 아닌 속집에, 그것도 별과에 천거된 사람의 하나로 이름만 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고로 흔히 알려진 '칭기즈 칸 어록'을 본따 창작된 이순신의 어록 중에서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는 대목은 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을 무시하는 것이다.
1545년 봄에 서울 건천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일대이며, 때문에 이 근처에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년 시절에 충남 아산으로 거주를 옮겼는데, 참외를 주지 않았다고 말을 몰아 참외밭을 짓밟았고, 맹인인 친구를 속여서 친구네 동아를 서리하게 하는 등의 일화로 보아 어려서는 상당한 악동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성장하며 철이 난 후 공이 20세 되던 1565년에는 무관 출신으로 보성 군수를 지냈던 방진(方辰)의 딸 방수진(方守震)과 혼인하였고, 22세 즈음에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28세에 무과 별시에 응시하여 승마 도중에 갑자기 말이 넘어져 낙방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서는 빈혈이었다고도 하고 이때 발목을 다쳤다거나 다리가 부러졌다고도 한다. 위인전에는 낙마한 직후 시험장 안에서 자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그 껍질로 다리를 동여매고 시험을 속개했으나 결국 탈락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시 이로부터 4년이 지나 32세가 되던 1576년 2월이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급제하여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했다. 이렇게 이순신은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육군 초급 장교로 처음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하던 초급 장교 시절 (함경도일기)라는 진중 일기를 남겼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는데, 사실은 이미 이 일기(단 하루치 뿐이었다)가 일반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실은 위조품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다만 발견자인 노산 이은상, 그리고 이순신의 일기로 고증한 서지연구가 이종학 등이 워낙 쟁쟁한 인물이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몇몇 연구자들이 김성일의 유고집인 학봉전집에 실린 1579년 여행기 북정일록의 글자 몇 개를 바꾸고 날짜와 간지를 고증에 맞게 수정한 정교한 위조품임을 밝혀냈다. 이순신이 그 시기에 실제로 일기를 썼는지 안 썼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재 발견된 실제 일기는 없다.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3년을 근무한 이순신은 중앙직인 훈련원 봉사로 배속되었다. 종8품의 낮은 품계였으나 이순신은 병조정랑인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 하자 반대했고, 이 때문인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충청도 절도사의 군관이 되었다. 일단은 좌천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일로 그는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일본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자 선조는 능력있는 장군들을 특진시켜 배치하게 되는데 이순신도 그 중 하나로 서른여섯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 만호(종4품)로 부임해서 최초의 수군 근무를 시작한다. 이 전까지 종8품 이하였던 이순신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승진을 한 셈이다. 기록상으로 보아 발포는 판옥선 2척, 사후선 2척의 소형 수군 기지로 파악된다. 여기에서도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는데, 오동나무 사건과 이 사건 이후 부임해 온 전라 좌수사가 전임자인 서익의 말만 듣고 이순신을 해코지하려고 하다가 당시 전라 감영의 도사(都事) 직을 수행하고 있던 조헌이 이순신의 실제 근무 평점을 조목조목 들먹이고 타 진포와 비교하는 식으로 정면 논파해서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고쳤다는 일화가 제일 유명하다. 어쨌든 서익과의 악연은 계속 이어진 셈이었고, 이순신은 군기 경차관으로 온 서익이 조정에 근무 태만이라고 거짓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1581년 2년 전 재직한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이후 1583년 10월, 병마 절도사 발포 만호 시절 성박의 일로 이순신을 부당하게 괴롭혔던 전라 좌수사 이용이 함경도로 전근가면서 마침 모함을 받아 파직돼 있던 이순신을 일부러 지목해서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경도의 권관이 되었다. 다만 이는 이순신을 일부러 괴롭히려던 건 아니고, 이용이 잘못을 뉘우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때 이순신은 여진족의 족장 울지내를 유인 작전으로 생포했다. 다만 상관 김우서의 모함으로 전공은 인정받지 못했다. 김우서는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여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행동했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래도 그 이후 동년 11월엔 훈련원 참군(종7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아버지가 죽었는데, 당시 북방 최전방에 있다가 귀경하고 있던 이순신이었기에 이 소식은 이듬해 1월에서야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3년상을 지낸 이순신은 사복시 주부(종6품)로 복직되었다.
1586년, 42세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고, 1년 반 뒤에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했다. 이때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 당시 북병사 이일에게 밉보여 녹둔도 전투 이후 군관 이운룡, 이경록과 함께 자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하게 된다. 보통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 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 이상의 포로를 구출해 피해를 최소화한 전투를 패전이라고 하진 않는다. 아군 피해도 방어가 취약하니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북병사 이일이 거부해서 생긴 일이었으며 조정에도 대략적인 전말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선조는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일반적으로 패배한 것과는 다르다고 구분을 짓고 장형을 친 후 백의종군으로 마무리지었다. 아래는 관련 기록이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일 16일자'
녹둔도 전투는 조정에 이순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백의종군 석 달만에 이일이 이끄는 400여 명의 여진족 토벌군에 합류해 선조 21년인 1588년 1월에 일명 '신전부락 전투'로 불리는 대대적인 여진족 토벌전에서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을 끝낸 후 아산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이 천거하여 전라도 정읍 현감이 되었다. 정읍이 독립된 현으로 만들어진 후 최초로 부임한 현감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선조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한 번에 종6품에서 종3품(10급 승진)까지 진급할 수 없다고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0년부터 1591년까지 이순신의 인사 발령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고을 현감, 육해군 절제사의 직책의 발령이 계속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인사 발령 및 승진은 당시 조선의 급박한 전쟁 준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능하고 실전 경험 있는 장수를 최전선에 배치하기 위한 특례였다. 또한 이는 이미 이순신이 이때부터 조정에 유망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관들이 이순신이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는 불차채용이라는 방식으로 비변사가 처음 선조에게 올린 불차채용 대상자 명단에는 이순신의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선조가 따로 몇몇 장수를 거론하여 추가시켰는데, 여기에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전의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하고, 곧바로 이번에도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 좌수사로 임명했다. 이 때 간관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간하자 선조는 다른 사람의 승진은 좀 늦출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전라 좌수사 발탁은 끝까지 고집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조선을 구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드디어 1591년 47세로 정3품인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2년 만에 종6품에서 정3품이 된 것인데 이는 조선 왕조에서 빠른 속도의 승진으로 이름난 조광조와 비슷한 속도였다. 조광조는 2년 4개월 만에 종6품인 사간원 정언에서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이 된다. 여기에서 유성룡과 선조가 얼마다 다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둘 수 없는 무리수였다.
전라 좌수영은 5관 5포, 즉 5개 고을과 5개 전문 수군 기지 소속 병력을 지휘하에 두고 있었으며, 이순신은 이들의 전력 강화에 주력했다.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도 이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순신은 전란에 대비해서 실전과 완벽하게 동일한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실행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휘하 군관들의 순번을 정해서 차례대로 가왜장(假倭將)으로 임명했고 이 가왜장이 이끄는 함선이 가왜장선이 되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항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마저도 엄격하게 진행했으며 제대로 된 격식을 갖춰서 가왜장으로 임명된 군관에게는 직접 가왜장 임명서를 발급하기까지 했다. 이순신은 전란을 대비해서 거북선만 건조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전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이순신은 이틀 뒤에 이 사실을 고지받았다. 5월 4일 최초의 출격 작전(일명 1차 출전)으로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적선 26척을 전멸시켜 임진왜란 최초로 승리를 거뒀다. 옥포 해전은 임진년에 벌어진 여러 해전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룬다. Search & Destroy. 즉, 수색 섬멸전은 이순신이 임진년 당시 사용했던 기본 전략이었다. 이 전투에서의 조선 수군 피해는 부상자 3명. 옥포 이후 적진포와 합포에서 각각 5척과 15척을 추가로 격침하고 여수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했다. 선조는 이 싸움의 공으로 공을 가선대부로 봉한다.
5월 29일에 이순신은 노량에 적선들이 왔다는 정보를 듣고 2차 출전을 시작, 사천에서 적선 12척을 격멸한다. 여기서 최초로 거북선이 투입됐다. 여기서 이순신이 조총에 부상을 입었다. 6월 2일에 왜선들이 당포에 집결해 있다는 걸 알고 당포로 향해 21척을 박살내고 당포에서 도망간 왜선들이 당항포로 도망갔다는 걸 알고 추격해 당항포에서 39척, 율포에서 7척을 격침했다. 2차 출정에서 조선 수군 총 전사자는 11명. 이 공으로 8월 16일 자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7월 4일에 가덕도와 거제도 등지에 왜선 40여 척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들은 이순신은 3차 출전을 감행, 7월 6일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다. 이는 대첩이라 부를 만큼 세계 해전사에서 의미 깊은 전투였다. 이때 사용한 전술은 거짓 후퇴로 인한 유인 후 함대 반전 및 포위 섬멸인데 이토록 복잡한 함대 운용을 보여준 해전은 거의 없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일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알키비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네 해군이 스파르타의 해군을 상대로 쓴 적이 있었다. 여기 참고. 이런 전술을 실전에서 육지에서라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명장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을 정도다. 이순신은 항구에 틀어박힌 적의 주력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해서 격파했다.
여기서 흔히 세간에서 이순신의 장기로 인식되는 학익진이 처음으로 구사되었다. 학익진은 본디 단순한 포위 섬멸용 진형이나, 이순신은 이것을 거짓 도주하다가 돌연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 적을 포위, 섬멸하는 전술로 개량하였다. 성능이 우수한 전함, 강도 높은 군사 훈련과 지휘관의 대담성만이 학익진 성공을 담보할 수 있었다. 거짓 후퇴 전술은 자칫 진짜 패퇴가 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전술임을 생각해본다면 이순신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한산도 대첩은 규모로만 따지면 국지전이었으나 그 결과는 임진왜란 전체의 국면을 바꾸어놓았다. 적들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조선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보급로가 끊겼으며 적의 서해 우회를 좌절시킴으로써 조선은 전라, 충청, 황해 등 주요 곡창 지대를 지켜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군과 의병들이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곡창 지대가 온전히 남아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군은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지휘 계통 또한 회복되었다. 또한 한산도 대첩의 소식이 퍼지자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면서 의병 활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산도 대첩 참고.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가덕도로 향하려다가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7월 10일 안골포에 도착하여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왜선 40여 척을 추가로 박살내고 여수로 귀환한다. 총 전사자는 19명. 이제까지보다는 조금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새발의 피 수준이다. 이 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3차 출전으로 왜군의 수륙 병진 계획은 완전히 좌절됐으며 이 과정에서 가뜩이나 모자란 화약과 화포를 포함한 수많은 물자와 인력이 물고기밥이 되자 경악한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까지 내리고 만다.
일각에서는 이순신의 성과를 단순히 보급 차단 수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나 보급 차단은 보기에는 적 전투 병력 섬멸보단 그 비중이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봐야 한다. 몇 백 년 뒤, 독일군의 북아프리카 전선 붕괴나 미국의 무기대여법 같이 해상 보급로는 그 유지에 따라 전선은 물론 전쟁의 흐름까지도 결정짓게 된다.
일본의 보급은 부산 항으로 하역된 물자가 육로로 이송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기본 계획은 접수한 정복지에서의 현지 조달이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가다노 쓰기오나 기타지마 만지, 사토 가즈오 등 일본 측 역사학자들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기타지마 만지 교수는 당시 제대로 된 육로가 닦여 있지 않아 수레를 운용할 수도 없는 조선에서 육로를 통한 보급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억지로라도 부산에서 조선의 각 전략적 요충지 및 주둔지까지 육로로 식량을 조달할 경우 이를 수송할 인원과 호위할 인원들이 대거 필요하고, 이들이 목적지까지 가면서 수송할 군량을 먹어 치우고 빈 손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여 되려 본진에 돌아가야 하니 식량을 달라고 했을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게다가 보급 물품에는 군량 등 식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총의 탄환 및 조총의 부속품과 화약, 일본식 활의 화살 및 활대와 각종 병장기 관련 소모성 물품들이 필요하다. 현지 조달을 통해 식량을 그럭저럭 구했다 해도 이러한 것들은 현지 조달로 구할 수 없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장비 보급이 안 되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또한 손실된 병력의 보충 역시 수로를 통해 이루어지기때문에 이미 한양을 넘어 진격하느라 병력 손실을 입은 일본 육군이 더이상 병력 충원을 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일본군은 훗날 2차 세계대전에서도 스스로도 보급에 대하여 경시를 하다시피 한 데다, 가토급 잠수함을 비롯한 미 해군의 통상파괴 작전으로 그나마 유지하던 해상보급로마저 차단 당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도 애를 먹어야 했다.
따라서 이순신의 공로는 적의 해상 작전 전체의 봉쇄이자 보급로 차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적의 대전략 그 자체와 사기마저 붕괴시켰음을 의미했다.
8월 8일에 왜군이 김해와 양산 등지로 도주하려 한다는 정보를 받자, 이순신은 아예 적의 본거지가 돼버린 부산을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8월 24일에 4차 출전에 나섰다. 부산으로 향하는 길에 왜군이 5번이나 소규모 기습을 가하나 죄다 바닷속에 쓸어넣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대포로 포격을 퍼부어 왜선 100여 척을 죄다 가라앉힌다. 이때 전사자는 6명에 불과했다. 여담으로 이렇듯 피해가 적었던 것은 거듭된 패전으로 조선 수군만 보면 학을 떼게 된 일본 수군이 조선군의 출현 직후 배를 버리고 죄다 육지로 도주해 버린 까닭도 있다. 덕분에 손쉽게 적의 배를 싹쓸이했지만 이순신이 신임하던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해서 대승을 거두고도 이순신은 침울한 귀환을 했다.
부산포 해전의 결과로 본진마저 두들겨맞자 왜군은 더욱 조선 수군을 기피하게 된다.
부산포 해전은 전략적으로 볼 때는 빈 배 100척을 불태우고도 종전보다는 피해를 많이 입었기 때문에 한산 해전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다만 그 이후로 왜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고 촘촘히 함선을 배치해서 종전처럼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고 그 결과 조선 수군은 한산도에 주력을 전개하고 제해권을 완벽 장악한다.
임진년의 이순신의 공적은 첫째 우선 해상에서 승전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해상에서의 승전이 없었다면 한 방에 밀릴 뻔한 상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왜군의 침공에 왕과 양반, 무장, 평민, 노비 가릴 것 없이 도망가기에 정신없었던 상황이었는데 해상에서의 승전은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서 왜군의 침공에 저항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둘째 왜군의 주력은 육군이 아닌 수군으로서, 수군을 제압함으로써 전쟁 수행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다. 당초 왜군의 전략은 알려졌다시피 수륙병진이었고 해상에서의 승리는 따놓은 것처럼 왜군 지도부는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수군의 패배는 필연적으로 보급로의 단절로 이어졌고 진군한 육군은 고립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쉬운 예를 들자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급급한 상황에 비견될 만하다. 수군이 패함으로써 왜군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셋째 호남 지역을 수호함으로써 조선군의 보급선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유일하게 호남이 온전하게 보존되어서 추후 명군의 파병과 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특히 이순신은 전력을 유지하면서도 둔전에 힘쓰고 백성들을 보호해서 인심을 얻었다.
계사년(1593년) 2월 6일에 조선 수군은 5차 출전을 하여 웅포에서 왜군을 7차례 공격해 왜선들을 격멸했으나 육지에서 왜성을 쌓고 버티는 전략으로 대응 방침을 트는 바람에 작년에 비해서는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7월 15일에는 전라 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이주하고 돌산도에 피난민들을 위한 터전을 개간했다.
8월 15일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삼도 수군 통제사는 경국대전에 없는 별정직으로 전라 좌수영, 전라 우수영, 경상 우수영, 충청 수영으로 구성된 조선 수군 전체가 각 지휘관들의 갈등 없이 통제사 하나의 지휘를 따를 수 있는 직위였다. 현재로 치자면 해군 삼남 작전 사령관이나 해군 작전 사령관 급이라고 봐도 될 위치이다.
1594년에 6차 출전으로 당항포에서 다시 한 번 왜선 30여 척을 분멸하나, 담종인의 금토패문을 받고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항의의 서한을 올린다.
이때 (난중일기)서 본격적으로 원균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1595년에는 아예 원균을 조선 수군에 두지 말아달라고 상소까지 올려 보낼 정도로 둘의 사이는 험악해진다. 이 개놈이 나중에 조선 수군 장병들을 상대로 저지를 일을 생각해 본다면, 이순신의 사람 보는 눈이 참 탁월하다고 하겠다. 단 이순신은 자신을 비호한 류성룡, 이원익과 시시콜콜한 요구에도 모두 응한 충직한 부하들을 제외하면 다른 대신들이나 무장들 또한 제법 거리를 두고 묘사했고, 구면일 경우엔 경멸감도 나타냈다는 면에서, 그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그는 장수 평가 기준도 몹시 까다로워서 이순신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무장은 별로 없다. 개중에는 나름 능력있는 장수도 있었지만 비교 대상이 이순신이니... 대신 그는 남에게 엄격한 만큼 자신에게는 배로 엄격했다. 또한 명이나 왜의 장수들에 대해서는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는데, 조선의 장군이 침략군의 장군에게 증오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여준 각종 범죄는 비난받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둘 사이의 영향인지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직된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가자 이번엔 기근과 전염병이 조선 수군을 괴롭혔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 대규모 징발, 토지 유실은 농업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를 불러왔고 이는 3년에 걸친 지독한 흉년으로 이어져 보급과 병력 유지에 치명타를 입혔다. 여기에다 가공할 역병까지 겹쳐 수천의 장졸들이 역병으로 떼죽음을 당했으며, 이때문에 탈영병도 속출했다. 이순신은 1594년 4월 20일에 작성한 장계에서는 삼도 수군 17000여 명 中 사망자 1904명, 감염자 3759명. 도합 5663명의 비전투 손실을 입었음을 밝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순신은 탈영병을 처벌하고 어떻게든 병역 자원 유지를 위해 애쓰는 한편 피난민, 유민들을 수습하고 둔전을 경작해서 보급을 자급자족하였다.
"만약 이순신을 병신년과 정유년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ㅡ(선조 실록) 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 사관의 논평
정유년(1597년)이 밝아오자 이순신에게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첫 번째는 부산 왜영 방화 사건. 이순신이 자신의 부하들인 안위와 김난서 등이 부산 왜영에 숨어들어서 적의 배와 장비들을 불태웠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는데, 이 보고 이후 이조 좌랑이던 김신국이 이순신의 보고를 허위 보고라고 올린 사건이다. 이원익의 추가 보고와 의금부의 조사 결과, 이순신의 보고는 아래 부하들이 허위로 이순신에게 보고를 올림으로써 이순신이 왕에게 보고를 허위로 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이게 이후에 이순신이 파직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다만 의금부의 조사 결과와 이원익의 추가 보고만으로 이순신이 거짓으로 조정에 보고를 올렸다고 하기에는 무리인 부분이 많은데, 조정에서도 분명 이순신의 부하가 이순신에게 허위 보고를 올려서 이를 그대로 알리다 보니 졸지에 거짓 보고를 하게 된 것이지 이순신이 의도적으로 허위 보고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위 보고를 올린 관계자들이 조사를 받았지만 막상 서울까지 압송된 사람은 이순신밖에 없다. 정말 허위 보고 당사자를 조사하고자 했다면 안위나 김난서까지 같이 압송되었어야 하는데 이들은 파직도 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의 파직이 결정됐을 때 선조는 자기 입으로 직접 부산 방화 사건은 안위와 김난서가 행한 일인데 이순신이 공을 가로챈 것이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이순신의 부하들이 한 행동임은 인정하지만 은근슬쩍 이순신 잘못으로 몰아갔으니 사실상 허위보고 사건은 그냥 명분에 불과하다.
두 번째는 가토의 도해. 1597년에 일본의 이중간첩인 요시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 정보가 조정에 보고된 것이 1월 1일. 조정에서는 즉각 비변사에서 회의를 거쳐 이순신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는데, 이순신이 1월 6일부터 남해현에 공무차 들어갔다가 풍랑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다 보니 가토가 진작 바다를 건너서 부산에 도착해버렸다. 조정에서도 이를 파악하여 가토를 잡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 추가로 있을 상륙 부대에게 압박을 주기 위하여 부산포로 출격을 명하고 이순신은 69척의 함대로 부산포를 두들기는 등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가토를 잡지 못했다고 책망하면서 자신이라면 잡을 수 있다고 한 원균의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오고, 이와 더불어 이순신을 숙청하려고 이미 혈안이 되어 있던 선조에 의해서 싸우라는 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1597년 2월 26일에 이순신을 파직 및 압송하고 그 후임으로 원균을 임명한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이 3월 4일에 금부에 투옥된 후 한 차례의 고신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록에 나온 선조의 언행을 보면, 선조는 이순신을 두고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등 그 분노가 컸기 때문에 고신의 강도 또한 가볍지는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하지만 이원익과 권율, 결정적으로 정탁의 적극적인 변호로 이순신은 목숨은 지키게 됐다.
불멸의 이순신의 영향인지 이순신을 역도로 몰아 가혹한 고문으로 반쯤 죽여놓다시피 했다는 인식이 많다. 대중 매체야 자극적인 장면이 나오면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렇게 한 것이고 보다 사실에 가깝게 살펴보면, 고신 과정이 잘 드러나 있는 남이의 옥사처럼 취조 과정에서 제대로 된 답변이나 자복을 하지 않을 시 곤장을 정해진 횟수만큼 때리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역모 사건 정도는 되어야 하위 절차를 거쳐 압슬 등의 강한 고문이 가해지기 때문에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이순신 역시 사실 관계를 우선적으로 밝히는 양상으로 추국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신의 목적은 죄인의 자복을 받아내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다. 즉 이순신이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만신창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백의종군 직후 앓아누운 횟수가 늘어나긴 하지만 조선시대에 50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으며 주당에 장기간 스트레스에 시달려 온 사람이다. 저 지경이면 누구든 몸 망가지기 십상이다.
이 당시 이순신에게 어떤 고문이 가해졌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정탁의 신구차에 한 차례의 형신이 있었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형신은 정강이를 때리는 고문으로, 고통스러웠겠지만 주리틀기가 기본 옵션인 사극과 비교하면 강한 고문은 아니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출옥한 4월 1일에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셨고, 이틀 뒤인 4월 3일에 말을 타고 출발해 다음 날인 4일에 수원, 다다음 날인 5일 아침에 아산에 도착한다. 도성에서 아산까지는 직선 거리로도 90km 가까이 되고 길을 따라갔다면 못해도 이틀간은 110km는 말타고 달렸다는 말인데 몸이 상할 만큼 심한 고문을 받았다면 술을 퍼마시고 저 거리를 말 타고 달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목숨을 바쳐 왜적을 5년 동안 한 번의 패배 없이 막았음에도 적의 반간계에 넘어가 파직으로 화답한 선조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 고문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 역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노엽지 않은가? 그대를 조선군의 수괴라 부르는 적보다
역도라 칭한 군왕이 더 노엽지 않은가?
그 불의에 맞서지 못하고, 그대의 함대를
사지에 이끌고자 하는 세상의 비겁이 노엽지 않은가?
칼은 살뜰하게 내게 보챘다.
적의 피로 물든 칼을 동족의 심장에 겨누지 마라.
그 무슨 가당찮은 오만인가?
어찌하여 노여움을 참고 있는가?
이 바다에서 수많은 적에게 겨눴던 그 칼을
그대의 노여움에 겨눠라.
'내가 진정 베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내 자신'이라
칼을 달래고자 했으나 그 울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하여, 차라리 육신이 죽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이 내 몸은 죽어지지 않았다.
ㅡ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93화 中
한편 파직과 백의종군 외에도 이순신의 일생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때였다.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올라오던 이순신의 모친 변씨가 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이순신은 엎어져 몸부림을 칠 정도로 슬퍼한다.
여담으로 이순신과 조선은 동아시아의 역사적으로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똑같이 조국을 멸망의 수렁에서 겨우 건져내고 있었던 이목, 악비, 원숭환은 결국 내부의 적이나 외부의 반간계에 휘말려 처형을 당했고, 나라를 홀로 버티고 있던 버팀목이 사라지자 조국도 멸망하였지만 이순신은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이라는 조선 특유의 정치체제가 빛을 발휘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7월 16일 원균의 지휘 아래 출격에 나선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했다. 이 부분에 대해 원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당시 조선군은 장비에 있어서 일본군보다 크게 뒤쳐지지 않았지만 이를 활용할 교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병사들의 질이 낮아 사기를 담보하기 힘들었기에 이런 대규모 도주가 일어난 것"이라 말한다. 물론 조금의 사고력이라도 갖춰져있다면 애초에 입밖에 낼 수도 없는 수준의 망발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래 5년간 이순신이 지휘해서 벌인 해전만도 20회가 넘는데 운용 교리가 없다는 소리가 말이 되는가? 병사들의 질이 낮았다는 것도 마찬가지. 5년간 이순신 밑에서 싸운 병사들이면 이미 베테랑 수준이다. 전세계가 입을 모아 어렵다고 인정하는 해상 학익진을 구현해낸 함대의 승조원들이 질이 낮았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생각해보자. 질이 낮은 인원들이 어떻게 딱 2달만에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뒤집기 한판을 만들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사자가 지휘하는 양떼가, 양이 지휘하는 사자 떼를 이겼다는 속담이 더 잘 들어맞는다. 그만큼 지휘관의 역량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만일 그래도 운용교리가 없다고 정녕 말하고 싶다면 원래 있었는데 원균이 그걸 활용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순신의 운용교리를 따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기만의 운용교리를 만들지도 않았다고 말하는게 더 맞다. 실제로 이순신과는 달리 원균은 함대를 지휘하는데 있어 제대로 된 운용체계가 없었다. 기록상으로 나온 이순신과 원균의 모습을 보면 이순신은 전투 전 정찰을 먼저 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지만 원균은 이순신 옆에서 그렇게 많이 싸우기라도 한 인간인데도 이순신으로부터 눈꼽만큼도 배우지 못한 건지 정찰은 커녕 무작정 돌격만 하다가 함대를 말아먹었다. 평시 부대관리 측면을 봐도 이순신은 어떻게든 자원을 끌어모아 철저한 훈련을 거쳤고 그 와중에 노는 자리를 만든다 해도 그 행위들은 부하들과의 유대감을 다지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원균은 그런 것도 없었다.
이순신이 힘겹게 모아놓은 300여 척의 함대가 고스란히 사라졌고 이는 다시 말해 조선 수군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전력이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조선 수군의 전력 전체가 소멸한 것. 그나마 배설이 전함 12척을 수습해 장흥으로 퇴각했다. 이 전함들은 이후 명량 해전에 투입되었다. 또 이후에 비정상적인 조선 수군의 전력 회복을 근거로 이때 대부분의 조선 수군 함선들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도주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원균의 패전 책임은 분명했다. 그 후 원균의 생사는 불명. 왜군에게 죽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인식이지만 전후 그를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기에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다. 실록에서의 마지막 원균의 목격담은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이후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처참한 패전으로 조선은 남부 제해권을 상실했다.
당황한 조정은 7월 23일 모친상을 당한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했다. 여담으로 이때 선조는 과인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는 교서를 내릴 정도로 저자세로 굴면서도 실제 품계는 원래보다 1품계 강등된 정3품 절충장군 품계를 주어 뒤통수를 쳤다. 지금으로 치면 대장 계급의 해군참모총장이 억울하게 누명쓰고 해임되었는데, 정작 같은 직책으로 복귀할 땐 소장이 된 셈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이순신은 다른 수군 절도사와 같은 품계 즉 계급이 되기에 지휘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순신이 지휘할 수군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 통제사였다.
다행히 배설이 칠천량 전장에서 미리 빼놓은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었다. 이순신은 다시 통제사로 제수되자마자 배설을 추궁해 배설이 숨겨놓은 함대의 위치를 알아내 함대를 인수하러 출발한다. 이때 곧바로 남해안으로 가지 않고 초계 -) 하동 -) 구례 -) 곡성 -) 순천 -) 보성 순으로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병사를 모집하고 물자를 다 긁어가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선조의 뜻을 알리는데, 이는 수군을 폐하고 충청도로 올라와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어떠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싸우기를 결심하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장계가 바로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란 전설의 대사로 대표되는 '상유십이' 장계. 남해와 서해 남쪽을 완전히 내주더라도 어떻게든 훗날을 도모해보자고 정부에서 권하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싸우기를 결심한다. 그 와중에 배설은 다시 탈영하여 종적을 감춘다.
9월 16일 이순신은 수습한 전함 13척(이후 1척이 더 보강되었다)과 어선 일부를 대동하고 명량에 출격했다. 이때 초반에 전투에 나선(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가늠했던) 왜군 함선만도 133척에 달할 만큼 절망적인 전투였으나, 이순신은 수많은 왜선을 격침하고 결국 승리하여 왜군이 제해권을 잃게 만들었다.
세간에서는 보통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자진을 펼쳐 축차 전술을 펼친 적을 막아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당시 이순신이 탄 대장선을 제외한 12척의 배들은 정오가 지날 때까지 대장선이 패배하는 대로 도망가기 위해 뒤에서 미적거리다, 거제 현령 안위가 먼저 대장선을 구원하러 가는 것을 보고 나머지 배들도 뒤늦게 전투에 동참하였다. 즉, 믿기지 않게도 이순신의 대장선은 단 한 척으로 전투의 중반부까지 왜군의 전선들을 무수히 폭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원인은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당시 왜선에 비해 덩치도 크고 몸빵도 탄탄했는데 움직임까지 날렵했다.)과 그에 실린 화포를 비롯한 조선의 장사정 무기들의 압도적인 전투력, 그리고 훨씬 열세였던 왜군의 해전 무기 체계(조총과 일본 활, 칼)와 교리, 명량 주변의 지형 및 해류, 마지막으로 이들 요소를 더 굳건하게 만든 이순신의 전투 의지였다.
2011년 4월에 나온 '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지' 14권에 좀 더 충격적인 연구보고가 있다. 명량 해전이 일어난 날의 조류를 연구한 것으로, 과거 1965년과 1977년에 각각 당시 기준으로 측정했던 조류 측정치와는 달리, 전투 초기엔 오히려 조류의 유리함을 받은 것은 일본군이고, 반대로 통상의 상선은 가장 불리한 시기에 전투 초반을 싸웠다고 한다. #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류가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되면 통제사의 상선은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지세까지 거슬러가며 혼자 전반부 전투를 감당했다는 게 된다. 상식적으로 봐도 공격해오는 일본군 입장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류를 타고 방어군이 기다리는 함정속으로 들어올리가 만무하다.
이순신 본인도 난중일기에서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힘든 싸움이었으나, 어쨌든 명량 해전의 승리로 인해 조선은 칠천량 패전으로 궁지에 몰렸던 정유재란의 국면 전체를 뒤집을 수 있었다. 조선은 남부 제해권을 다시 회복했고 왜군의 서해 우회는 좌절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완전히 좌절시켰던 철벽 방어선 진주성은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정유재란 초반 일본군은 영남 남부 지방의 통로를 무인지경으로 통과해 호남을 싹쓸이했으나, 직산에서 명군의 빠른 진군과 완강한 저항에 직면해 패퇴한 후 충청도 일대에서 퇴각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명량에서 이순신의 경이적인 승전보는 일본군의 뇌리에 서해를 장악당함으로써 보급을 차단당했던 임진년의 악몽을 되살리게 했고 일본군의 북진 의지는 완전히 꺾인 채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겨울철임에도 왜성들을 쌓는 등 수성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이후 노량 해전이 벌어질 때까지의 2년간 해전은 3회. 일본 수군은 철저하게 이순신을 피하려고 했다.
일반적으로 당시 왜선의 숫자는 난중일기의 133척, 그리고 확실히 격침한 왜선은 대략 31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우선 왜군 전선이 133척이었다는 기록은 실록과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후대에 갈수록 수치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정조 대에 이르러서는 '500척'까지 불어나는 경향이 있다. 다만 현장에 있었던 이순신 본인이 당대에 남긴 기록인 난중일기의 수치가 대단히 설득력이 크고, 일본 쪽 기록과도 어느 정도 교차 검증이 되는 수치이다. 양측의 주장을 절충한다면, 500여척 중에 실질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전투함의 수가 133척이고 나머지는 보급선, 수송선 등의 비전투함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적선 31척을 격침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충무공의 성격상 확실히 침몰한 적선만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전과는 더 컸겠지만 일종의 축소보고를 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충무공은 도주한 적선이 수리를 받고 병력을 보충해 다시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적선을 단순히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것을 넘어서 가능한한 확실히 격침시키기 위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일각에서는 적선 100척을 격파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근거는 거의 없고, 다만 명량 해전 자체가 압도적인 숫적 열세 속에서 그저 적선이 오는 족족 전투불능으로 만들어 돌려보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격침에 신경을 못쓴 결과가 '고작' 31척 격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전투원들이 멀쩡해도 선체에 장군전을 비껴맞고 침수되어 돌격능력을 상실하였거나, 배는 멀쩡해도 전투원 다수가 코 앞에서 조란환에 맞아 죽거나 중상을 입어서 공세능력을 상실한 적선의 수는 배로 많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장선이 격침되고 선봉장 구루지마 미치후사까지 죽었으며 후방의 수군 총사령관 도도 다카도라가 활에 맞아 손에 부상을 당했고 도요토미가 보낸 군감 모리 다카마사까지 세키부네에 타고 있다가 급히 빠른 소선으로 옮겨타 도망갔다가 바다에 빠졌으며 '무사히' 돌아간 적선의 수가 10여척 밖에 안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교차 검증 부분에서는 애초에 일본 문서에는 명량 해전에 참전한 수군의 척수는 물론, 참전 다이묘도 총지휘관인 도도 다카도라와 구루지마 미치후사 외에는 참전했는지 참전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만일 진법표에 나와있는 약 8000명의 일본 수군을 토대로 60 x 133해서 비슷하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법표에 나와 있는 일본 수군이 과연 수부 같은 비전투 인원을 계산한 것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량 해전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비전투 인원을 계산할 경우 진법표에 나와 있는 일본 수군만으로도 거진 1만에 가까운 군세가 만들어진다. 더군다나 14일 탐망군관 임준영의 보고에서는 적선 200여 척이 확인되고 있다. 충무공의 조카 이분의 행록의 333척 기록을 믿기 힘들다고 폄하하지만, 행록의 기술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날 피난한 사람들이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적선이 쳐들어오는데 300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즉, 이분이 일부러 과장하고 싶어서 과장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피난민의 증언을 충실하게 옮겼을 뿐이다. 더군다나 500척 기술을 마치 정조 대에 과장한 것처럼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정조 대의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500척 이야기는 정조 대의 사람들이 알아서 부풀린 게 아니라 당시 피난민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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