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조선 제4대 국왕 世宗 세종
출생 1397년 5월 7일 (음력 4월 10일) 조선 한성부 준수방 장의동 본궁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즉위 1418년 9월 9일 (음력 8월 10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52년 10개월 23일 / 19,320일) 조선 한성부 영응대군저 동별궁
능묘 영릉(英陵)
재위 조선 왕세자 1418년 7월 6일 ~ 1418년 9월 9일 (음력 1418년 6월 3일 ~ 1418년 8월 10일)
조선 국왕 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 (음력 1418년 8월 10일 ~ 1450년 2월 17일) (31년 6개월 21일 / 11,525일)
섭정
태상왕 이방원 (1418 ~ 1422)
세자 이향 (1442 ~ 1450)
조선의 제4대 국왕.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휘는 도(祹), 자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 막내)이었다. 동생들인 정선공주와 성녕대군이 한참 터울을 두고 태어났기 때문에 꽤 오랜 기간 막내였다.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삼남. 고려 왕조에서 신하로 일하다가 왕위에 오른 선왕 세 명(태조, 정종, 태종)과 다르게 조선 시대에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첫 임금이다.
1408년에 충녕군에, 1412년에 충녕대군에 봉해졌다. 왕자 시절부터 이미 될 성 부른 떡잎을 보여, 한 번 잡은 책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원래 왕자는 종친일 뿐 과거를 봐서 벼슬길에 오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뛰어난 재주가 안쓰러웠던 태종은 아들의 취미생활들을 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한다. 덕분에 학문은 물론 미술, 음악, 수석까지 다양한 부분을 섭렵했고 오히려 대군이었기 때문에 제한받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였으므로 다양한 분야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대군으로서의 유복한 부르주아 생활이 다재다능한 왕으로서의 실력을 키워주는 데 복이 된 셈이다.
셋째 왕자이기 때문에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첫째 왕자(폐세자 양녕대군)가 평소의 망나니, 개차반 짓 때문에 끝내 폐세자가 되고, 그전부터 영특하고 어질기로 유명했던 셋째 왕자 충녕대군이 왕통을 잇게 되었다. 일부에선 양녕이 일부러 양보했다고 하나, 실상은 지나친 말종 짓 때문에 끝내 태종이 그를 비호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양녕대군은 제 버릇 못 고치고 여전히 망나니짓을 하며 세종의 속을 긁었고, 긁은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려서 재위 기간 초기에 세종의 약점이 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종의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도리어 양녕대군의 처우도 점점 좋아졌다.
아버지 이방원이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으로 왕위를 차지하며 왕통을 세우려고 했으나, 결국 자식 농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려야 했다는 것, 태종 이방원은 양녕대군을 계속 왕위에 올리려 했지만 양녕대군의 계속되는 망나니짓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게 실록의 팩트다. 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린 그 결과 한국사 최고의 성군이 나왔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왕이 외척, 친척, 공신 가리지 않고 걸림돌 될 거 같으면 싹 다 조져놨으니 그 카리스마에 나댈 수가 있나. 개기는 놈이 없으니 좋은 정책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이 상왕으로서 왕위에서만 물러나 세종의 보디가드 역할을 해준 것도 신의 한 수였다.
한편, 둘째인 효령대군은 평생 부처를 받드는 선비가 되었다. 효령대군이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에서 동생 세종에게 밀린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술을 못 마셔서다. 태종에 따르면, "술은 너무 많이 마셔도 안 되지만, 못 마셔도 문제가 되는데 전에 사신들이 왔을 때 보니까, 효령대군이 술을 잘 못 하는데 충녕대군은 마신다"는 이유였다. 원래부터 불가에 뜻이 있기 때문에 계승권에 관심이 없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다.
보통 위인전에서는 세종대왕이 왕자 시절 사심 없이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해서 태종의 눈에 들어 왕이 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 왕자들 간 암암리에 경쟁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크게 3가지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세자가 기행과 방탕함으로 입지가 약화되어 가고 있을 때에 맞추어, 충녕이 공적인 자리에서 총명함을 드러내었다. 이때마다 어김없이 태종이 칭찬하고 신하들이 칭찬하는 분위기로 흘렀고, 이는 세자의 심기를 많이 건드렸다.
둘째로 세자의 망동에 대놓고 직언으로 간하기도 했다. 매형인 이백강(태종의 장녀인 정순공주의 남편)이 거느린 기생을 세자가 데려가려 하자, 한 집안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꾸짖으며 "할머니(신의왕후 한씨)의 제삿날에 소인배들하고 어울려서 놀다니 이건 또 뭐하는 짓인가?"하고 디스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한 번은 "나 새 옷 장만했다."라고 자랑하는 세자에게 먼저 마음을 갈고 닦으라고 충고했으며, 옆에 있는 신하들도 대군의 말이 맞는다며 모두 세자를 까는 등 속을 있는 대로 다 긁었다. 한 달 뒤 열받은 세자가 태종에게 "그래봐야 말만 번지르르하지, 충녕은 심약한 놈이 틀림없다"고 헐뜯자 태종이 "충녕, 그 아이가 겉으론 유약해도 결단력에서 있어서 당할 자가 없다!"라고 오히려 두둔했다. 대충 보면 알겠지만 누구라도 욕할 짓만 세자가 골라 했다. 이런 일은 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이상의 일화들을 살펴볼 때, 충녕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큰형이 망나니스러운 행동으로 점차 신망을 잃어가자 본인도 세자 자리, 멀리 봐서 왕위에 대한 생각을 은연 중에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에 아버지 태종부터가 왕위를 쟁취해낸 사람이니…...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태종과 중신들도 점점 세자보다 충녕대군을 신뢰하는 모습이 기록에 나오고 있다.
따지고 보면, 건국 초기 시절이라 아직 적장자(嫡長子)가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만렙이거나 야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거나 왕위에 오를 수도 있던 시대였다. 조선 건국자인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실의 옥새를 빼앗아 조선의 초대 국왕으로 등극한 바 있고, 또한 아버지 태종 이방원도 다섯째 왕자로 왕위 계승 자리에 불리한 위치에 있다가 2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결국 국왕으로 등극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개국에 가장 공이 컸고 군왕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기에, 개국 초에 신료들이 적장자(이방우, 이후 이방우가 병사한 뒤엔 이방과) 아니면 공이 큰 왕자를 세자를 책봉하는 게 옳다고 의견을 낸 만큼 가장 유력한 세자 후보가 바로 이방원이었다. 문제는 계모이자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가 자기 소생의 자식들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고 무리수를 두었고, 이성계와 정도전도 동의한 바람에 개국 과정에서 마땅한 공이 없으며 나이도 어린 막내아들이 떡하니 세자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에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 특히 이방원은 가장 불만이 클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왕자의 난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국왕에 오른 부왕 태종은 자신부터는 왕위 적장자 승계 원칙을 누구보다 철저히 확립시켜 왕권 다툼에 대한 예방과 왕권 안정을 도모하고 싶었고, 그래서 세자의 계속된 비행에도 누구보다 장남이 정신 차리고 제대로 왕위를 물려받길 바랐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자신처럼 왕좌를 노리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유혈 투쟁을 하는 꼴은 부모로서도 보기가 싫었을 것이다. 원경왕후 민씨 역시 형제 간의 골육상쟁이 두려웠는지 세자를 폐하고 충녕을 새로운 국본으로 삼는 일에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자는 계속 부왕 태종에 눈 밖에 어긋나는 짓을 일삼았다는 게 문제. 여기서 세자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왕세자로서 모범을 보여주었다면, 프레임은 '삐뚤어지는 왕세자와 총명하고 반듯한 셋째 왕자'가 아니라 '정상적인 적장자와 꼬투리잡고 음해하는 왕자'로 바뀌어서 오히려 충녕대군에 대한 의심이 가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이런 와중에 셋째 충녕은 부왕 태종에게 세자의 행동을 고자질을 하는 등 세자를 압박하면서 견제하는 동시에, 자신의 모범생다운 행실을 보여주면서 태종과 신하들에게 점수를 땄다. 세종대왕의 즉위 뒤 쓰여졌다는 문제점은 있지만, 후에 양녕대군으로 폐해지는 세자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낸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태종실록 후기에서도 충녕(세종)이 알고보면 야심가였을지도 모른다는 평이 수록되어 있다.
능력만이 아니라 인성 면에서도 두 왕자가 대조를 이루었던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막내아우 성녕대군의 죽음이었다. 성녕대군이 큰 병에 걸려 죽게 될 때, 충녕대군은 의원과 함께 어린 동생 곁을 지키면서 의서를 탐독하고 열심히 간호하여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던 반면에, 세자는 이때 활쏘기나 하면서 놀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게 세자를 감싸던 태종마저도 이 사실을 알고는 "하는 짓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 같지 않다"라며 깊은 실망을 드러냈다.
사실 세자(후의 양녕)에게는 태생적인 결점이 있었다. 태종은 세자를 위해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생 원경왕후의 원망을 들어가면서까지 처가인 민씨 집안을 멸문했다. 그런데 바로 세자는 태종이 사저에 있던 시절 외가에서 자라 숙청된 외숙들(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과 매우 가까웠다. '혹시 그래서 폐세자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폐세자의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작 세자는 자기네 외삼촌들이 궁지에 몰리자 헌신짝마냥 외면했다. 민무휼·민무회가 원경왕후의 병문안을 왔다가 세자에게 "우리 형들이 죄 없는데 죽었으니, 우리만큼은 보전시켜 주소서"라고 했는데 세자는 "외삼촌들은 죽어도 싸다"고 비웃었다. 여기에 어이가 없어진 민무회가 "아니 대체 마마는 어느 집안에서 자랐습니까?" 라고 확 내질러버렸다. 어린 시절 민씨 집안에서 자랐던 세자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의미로 한 말이다. 같이 있던 민무휼이 수습하긴 했지만, 결국 각종 개차반짓으로 입지가 좁아진 세자는 점수를 벌어보겠다고 얼마 안 있어 그 일도 죄다 윗전(=태종)에 고변해서 민무휼·민무회를 죽게 만들었다. 비록 토사구팽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자기의 마지막 뒷배가 되어줄 수 있는 민씨 숙청에 가담한 세자는 현명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생각이 짧았던 것일까?
아아! 너 충녕대군 도는 관홍장중(寬弘莊重)하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17일 병신 2번째 기사. 정전에 나아가 세자와 경빈에게 책보를 내려주다.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충녕을 새 세자로 책봉한다. 1418년 8월 10일 세종은 보위에 오른다. 폐세자 직후에는 양녕의 장남, 순성군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박은 등 대신들이 반발해 뜻을 거둔다. 다음으로는 점을 쳐서 세자를 정하겠다고 했으나 다시 이 의견을 바꾸고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한다는 이유로 충녕을 세자로 지명한다. 사실 별 다른 이유 없이 앞선 두 의견을 물린 것으로 보아 형식적인 절차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태종은 세자 책봉 2달여 만에 전격적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태종은 재위 기간 수시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선위한다는 쇼를 벌이곤 했는데, 신하들은 그때마다 찬 바닥에서 절을 하며 말리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양위 시에도 신하들은 '이번엔 또 얼마나 선위파동이 오래갈려나?' 했는데, 태종은 "세자(충녕대군)에게 임금의 즉위복 차림을 입히고는 신하들 앞에 내보냈다." 물론 군주의 복장은 오직 군주만이 입을 수 있고, 한번 충녕대군이 군주의 복장을 한 이상 돌이킬 수는 없었다. 선위를 반대하던 신하들도 바로 군말없이 조복으로 갈아입고 세종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이는 불안정한 셋째 아들의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태종 자신의 남은 여생을 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1422년 죽을 때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진정한 조선의 국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완전히 잡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 첫 작업은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어찌보면 그로테스크했다. 태종은 세종의 처가인 심씨마저 멸문했던 것이다. 태종은 선위 직후 상왕으로 심온을 영의정 + 세종의 즉위를 알리는 명나라 사신으로 임명하며 힘을 실어주는 척 안심시켰다가, 시답잖은 사건을 끄집어냈다. 이른바 강상인 사건으로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 부분의 일을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 보고하자 그를 국문해 함경도 관노로 보냈다. 태종이 이미 "왕이 30살이 될 때까지는 내가 맡겠다"고 했는데 이를 어겼다는 죄목. 그가 태종을 아주 오랫동안 모셔온 공신임을 감안하면 매우 큰 형벌이다. 1달 뒤, 심온이 명나라에 간 사이에 재조사해 박습, 이조판서 심정, 동부총재 이관이 심온과 논의했다는 답을 얻어내 엮어냈다. 그러고는 강상인은 거열형, 이관과 심정은 참수형에 처해버려 잽싸게 죽였다. 그리고 귀국길의 심온을 붙잡아 고문했다. 이때 심온은 하루에 곤장을 2번 맞고 압슬형을 5번이나 받고도 자복하지 않았다가 유정현이 "이보시오, 심공, 당신 지위가 뭔지 알면 이게 뭐 하는 건지 알 텐데 왜 자복 안 하시오?"라고 하자 결국 자복한다. 유정현의 말을 듣고 심온도 처음부터 태종이 꾸민 짓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 심온은 다음 날 바로 사약을 마셔버렸다.
야사에는 "앞으로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박은을 두고 한 말 같은데 실제로 박은도 이 일에 유정현처럼 연루되어 있어서 애초에 심온을 경계했고 소헌왕후를 폐비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종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어머니를 노비로 강등시킨다. 사실 이건 명나라에게도 불경할 수 있는 짓이었다. 명나라까지 직접 사신으로 다녀 온 사람을 처형해 버리고 그의 아내를 노비로 만들었으니, 이렇게 되면 외교상 명나라에서 불편해할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애써 몸이 안 좋아 시골로 내려갔다며 거짓말까지 하라고 지시했다. 사실 중종반정 직후 연산군이 죽었는지도 몰랐던 걸 보면 홍무제 이후로는 명나라의 정보력도 생각보다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은 안 하지만 상황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초기의 청나라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1차, 2차 왕자의 난까지 고려하면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3대가 멸족을 당한 셈이다. 세종대왕은 태종 사후 황희 등의 주청을 받아들여 태종과 원경왕후의 유훈이라는 핑계로 장모와 처제들을 노비에서 풀어주고 직첩도 돌려주었으나, 그의 장인 심온의 사면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아들 문종 대에 가서야 사면이 되었다. 이는 선왕의 결정을 바꾸는 것은 선왕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와 선왕에게 불효가 된다는 유교사상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효를 행하는 것 중 하나가 선친(혹은 선왕) 사후 3년간(3년상 기간)은 생전의 처분을 바꾸지 않는 것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종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효 이전에 심온 본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심온 옥사 재수사는 세종이 물갈이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일이었고, 명분도 분명했던 정치보복이었으나 세종은 일체의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옥사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박은은 태종이 사망하기 직전에 병사했는데 사후 관직 박탈과 같은 처벌을 전혀 받지 않았다. 심온에게 자복을 받아내고 심온 가족의 처벌뿐만 아니라 소헌왕후의 폐비까지 주장했던 유정현도 계속 좌의정으로 일하며 국가의 재정 분야의 일을 하면서 궤장까지 받는 명예를 얻었으며, 72세가 되어서야 은퇴해서 곧 자연사했다. 선왕 대의 단호한 폐비 결정으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연산군, 광해군, 경종 등은 어머니들을 조금이라도 복권하려고 했다. 이들은 피바람이라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이뤄냈던 반면, 세종은 그러지 않았다. 정조 또한 사도세자의 복권을 관철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작게나마 복수도 행했는데 말이다. 30년간에 걸친 세종의 숙청 없는 정치란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도 참 특이한 일이다. 다만 그 때문에 소헌왕후는 개인적으로 고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 심온이 죽을 당시에 왕후 본인은 임산부(4남인 임영대군을 임신 중)였다.
어쨌든 이러한 일련의 과정 이후, 세종은 즉위한지 4년 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대로 된 왕이 되었다...는 건 아직 이른 말이었다. 태종은 죽었으나 아직 조정엔 태종의 사람들뿐. 세종 4년 당시,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이원, 우의정 정탁, 병조판서 조말생, 이조판서 허조, 호조판서 이지강 등 주변엔 태종의 사람들만이 있었다. 이 신하들은 초장부터 세종을 잡으려는 의도였는지, 세종의 말에 따르질 아니하고 자신들의 맘대로 일을 진행하려는 속내를 내비친다. 대표적인 일이 폐세자 양녕에 관한 일. 태종의 상을 치르기 위해 유배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양녕을 탈상 전부터 다시 유배지로 내보내라는 상소를 사헌부, 사간원, 육조, 의정부 등지에서 끊임없이 올리기 시작한다. 이때 상소의 내용 중 하나는 "양녕의 거취는 신들이 태종에게 위임 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론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라는 것. 즉, 양녕의 일은 신하들이 태종한테 위임받았으니 지금 왕이라 할지라도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소가 줄을 잇자 세종은 "야, 이거 내용이 전에 올린 글이랑 똑같잖아. 니들은 상소문을 목판에 찍어서 올리냐? 이건 거꾸로 접었구만."며 상소를 던지기도 하고, 무시도 하지만 결국 신하들의 압박에 못 이겨 양녕을 내보내게 된다.
"이제부터는 양녕이 들어온 때에 이와 같은 봉장(封章)은 다 접수하지 말라. 또 이 봉장의 글은 도대체가 진부한 말뿐이다. 전일에 올린 것과 다름이 없으니, 목판에 새겨 두고 찍어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냐. 또 이 봉장은 거꾸로 접어서 봉(封)하였구나.
『세종실록』 세종 15년 12월 27일 병자.
이러한 즉위 초의 상황은 세종이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진 험한 길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던 중, 세종에게 한 가지 반전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이다. 사정은 이렇다. 고려 말 김도련이라는 사람의 아버지가 함경도에서 양인 426명을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들어 자신이 관리하고, 당시의 권문세가 임견미에게 뇌물청탁을 하여 이를 허용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임견미가 죽고 고려가 망하면서 이 노비들이 다시 양인으로 돌아왔는데, 조선조에 들어와 그 아들 김도련이 노비 426명과 그 자손들까지, 거의 1000명을 자기 소유 노비로 되찾겠다고 한 일이 이때 김도련이 당시 조선의 권력자들에게 노비로 뇌물을 주어 큰 문제가 되었다. 병조판서 조말생부터 시작해서 평성부원군ㆍ우의정ㆍ좌의정ㆍ곡산부원군 등 여러 권력자들이 연루되었고 이때 바쳐진 총 노비 수만 132구(口: 노비를 세는 단위). 가히 조선 초 최고의 뇌물 스캔들이라 할 만했다. 당시 노비 한 구당 현재 가치로 천만 원 정도였고, 노비도 사람인지라 자손을 낳으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나므로 이 뇌물 스캔들의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가능하다. 그중 가장 중요했던 인물이 당시 병조판서였던 조말생으로, 노비를 무려 36구나 뇌물로 받아 이 뇌물 스캔들의 가장 중심적 인물로 떠오른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세종 4년(1422)으로 처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않았다. 그러나 4년 뒤(1426)에 사헌부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즉시 조말생은 파직되고 유배형을 받았는데,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함경도에 사람을 보내 낱낱이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말생의 다른 죄들이 드러났다. 이때 조말생이 노비 36명에 장물 7백 80관, 현재 가치로 약 14억 원 정도인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말생은 교형을 받을 뻔하였으나 유배로 그치게 된다. 자세한 것은 조말생 문서 참고. 또한 관리 17명이 노비 132명을 뇌물로 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나자, 세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관련자들에게 유배 혹은 파면 등의 처벌을 내렸다. 이로 인해 태종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세종의 세력으로 조정을 채울 수 있었다.
이듬해 세종 9년(1427) 1월에 황희를 좌의정으로, 맹사성을 우의정으로 승진시키면서 세종의 본격적인 성군으로서의 행보가 시작되게 된다. 서울시립대 사학과 이익주 교수는 역사저널 그날 시즌 2 155회에서 이 사건을 가르켜 "고려의 정치체계에서 조선의 정치체계로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라 평한다.
한양 대화재
세종 8년 2월(1426년)에 한성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세종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훌륭하게 후속 대책을 시행하긴 했지만 이 화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 아닌 평시에 발생한 재해 중 한성을 가장 크게 파괴한 재난이었다.
시작은 1426년 2월 15일의 화재였다. 이날 경시서(京市署)와 북쪽의 행랑 106간, 한성부 중부(中部)의 인가 1630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불에 탔다. 당시 세종과 세자 문종은 군사 훈련인 강무를 위해 강원도 횡성에 있었으므로 중전인 소헌왕후가 대응을 맡았는데, 그것도 금성대군을 임신한 상태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또한 다음 날인 16일에는 전옥서(감옥과 죄수들을 관리하는 관청)와 행랑 8간, 민가 200여 호가 불에 탔으며 보신각 종루까지 불에 탈 뻔했으나 간신히 진압했다.
세종은 16일에 급보를 접하고 19일에 한성에 돌아와서 대응을 지휘했다. 큰 화재는 잡혔지만 소소한 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이를 틈타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는 등 재난이 끝나지 않자, 세종은 계속해서 대책을 수립했다. 부상자의 치료와 이재민에 대한 식량의 배급 등 1차적인 대책을 수립한 한편, 화재 예방을 담당하는 금화도감을 설치하고 가옥의 개량 및 지나치게 좁은 도로들을 정비해 큰 화재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태종이 쫓아보낸 양녕대군을 세종이 차마 내칠 수 없어서 궁에 들여보내 줬을 때, 이를 말리는 상소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때 세종이 말하길, "신료들은 들어라. 이제부터 큰 형님과 관련된 상소문은 받지 말도록 하거라. 며칠 전부터 상소문이 계속 올라오는데 어찌 그 내용들이 죄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을 수가 있느냐? 무슨 목판을 만들어서 찍어낸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어허, 거참. 이 상소문은 거꾸로 접어서 보냈구나."
"이제부터는 양녕이 들어온 때에 이와 같은 봉장(封章)은 다 접수하지 말라. 또 이 봉장의 글은 도대체가 진부한 말밖에 없구나. 전날에 올린 것과 다른 게 없으니, 목판에 새겨 두고 찍어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냐. 또 이 봉장은 거꾸로 접어서 봉(封)하였구나.
『세종실록』 세종 15년 12월 27일 병자
1397년 생으로 조선 시대에 태어난 최초의 왕이기도 하다. 초대 할아버지, 2대 큰아버지, 3대 아버지 모두 고려 시대에 태어났다.
세종의 뛰어난 업적 때문인지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종 재위 시기인 1446년에는 대성산에서 도적떼가 나타나자 이를 진압했다.
한국 최초의 이지스 구축함인 KD-3 1번함은 이 왕의 이름을 따 세종대왕함으로 명명되었으며 이후 동일함급은 세종대왕급 구축함이 된다. 이지스함 1번함에 불릴 만한 인물이라면 세종 아니면 이순신뿐이지만,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이 KD-2 구축함에 명명되면서 후속함인 KD-3 1번함에 세종이 낙점된 듯하다. 두 급의 구축함 모두 한국 해군 제7기동전단의 일원으로서 활동 중이다.
세종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세종이라는 이름을 붙인 고유명사가 매우 많다. 상기한 것처럼 세종대왕급 구축함 이외에, 세종시, 세종과학기지, 세종로 등등… 이름 자체가 갖는 이미지가 엄청나기도 하고 라틴문자로 표기하기에도 적절해서 그런 듯하다.
세종에 대한 어록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 서문
"그는 족보로 된 임금이 아니다. 전주 이씨의 임금이 아니라 하늘이 낸 임금이었다. 그가 정음을 짓고 모든 책의 언해를 만든 것은 모두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정말 민족 걱정을 한 이요, 정말 인생 걱정을 한 이다. 어쩌면 그런 어진 마음이 이 역사에도 났을까? 공자가 관중의 역사적 공로를 칭찬하여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야!" 하였다지만, 오늘 우리야말로 이 사람이 아니고 그냥 짜 먹자는 그놈들만이 있었다면 정말 짐승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함석헌
영민하고 총명했으며 강인하고 과감했다.
무거우며 굳세였고 점잖고 후덕했다.
크고 너그러웠으며 어질고 사랑하였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태어날 때부터 그러하였다.
(英明剛果, 沈毅重厚, 寬裕仁慈, 恭儉孝友, 出於天性)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太宗)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書籍)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 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즉위함에 미쳐, 매일 사야(四夜) 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輪對)를 행하고, 다음 경연(經筵)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顧問)으로 하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證憑)과 원용(援用)을 살펴 조사하여서, 힘써 정신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아, 문(文)과 무(武)의 정치가 빠짐 없이 잘 되었고, 예악(禮樂)의 문(文)을 모두 일으켰으매,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 같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하였으며, 두 형에게 우애하니, 사람이 이간질하는 말을 못 하였다. 신하를 부리기를 예도로써 하고, 간(諫)하는 말을 어기지 않았으며, 대국을 섬기기를 정성으로써 하였고, 이웃나라를 사귀기를 신의로써 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늦으막에 비록 불사(佛事)로써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번도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한 적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32년(1450) 2월 17일 첫 번째 기사. 임금이 영응 대군 집 동별궁에서 훙하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으로서 제도와 시설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정인지, 《훈민정음》 서문 중에서.
여기서 '하늘이 내리신 성인'의 원문은 天縱之聖(천종지성). 이 말은 공자나 제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관용구이다. 딱히 세종에게만 쓰인 독특한 표현은 아니지만 정인지는 물론 당시 신하들이 세종에 대해 가졌던 공통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농사직설: 조선 풍토에 맞는 농서 편찬 지시.
대마도 정벌: 이종무 장군에게 명해 왜구를 토벌.
4군 6진 개척: 최윤덕 장군(4군)과 김종서 장군(6진)에게 명해 두만강까지 영토를 확장.
집현전: 정책, 학문 연구 및 국왕자문기구 설립.
고려사 편찬.
훈민정음: 세종대왕 최대의 업적이자, 민족 역사상 최대의 업적.
정간보: 박연이 음악 정리, 새로운 악기 개발.
속육전, 등록 등의 법전 편찬 및 정리.
해시계 앙부일구, 물시계 자격루 등 발명.
유교 사상 발전.
전세 제도 확립.
총통, 신기전, 화차를 비롯한 각종 화약 무기 대대적 개발, 개량.
한성을 기준으로 한 역법인 칠정산 편찬.
쉽게 말하자면 당대 모든 분야, 즉 농업, 문학, 사학, 언어학, 음악, 법학, 수학, 과학, 공학, 철학, 경제학, 재무학, 회계학, 천문학, 물리학은 물론 군사적인 측면과 인권에도 신경 쓴 임금. 간단히 요약해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의 수준을 한 번에 몇 단계씩 끌어올렸다. 극단적인 견해로 조선은 사실상 세종대왕 집권 대에 다 만들어졌으며, 이후 수백 년간 그 틀을 거의 바꾸지 않고 약간씩 보수만 하면서 흘러갔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모든 업적을 하나씩 모두 외워야 한국사 시험을 볼 수 있다는 말씀(성종 때 대부분 완비가 되어서 암기할 부분이 많으나 세종에 비하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사실상 신하와 왕의 학술 토론회인 경연도 고려 예종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상설화 된 것은 조선 세종부터다. 상설화된 것은 그만한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는지 세종은 경연 때마다 신하들 공부 안 했다며 잘 굴려댔다. 물론 세종에게 공부 안했다고 잔소리 듣는 신하들은 과거제에서 최소 전국 33등 이상을 찍고 관직에 진출한 굇수들이다.. 재미있는 점은 세종 시절이면 왕권이 충분히 강화된 시점인데 왕권 강화책을 강조하지 않으며 신하들과 나라를 어떻게 꾸려갈지 매주 이야기 했다는것. 이것으로 이 분이 왜 성군이고 어떻게 이 치세 때 좋은 인재들이 나온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전세 제도의 확립 과정에서 토지 질이나 풍흉에 관계없이 똑같이 세금을 내는 세법인 '공법'을 제정하려 할 때에는 관리와 백성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행하기도 했다. 1430년 전국의 17만여 가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반 년 남짓 소요되었는데 공법 찬성은 9만 8천여 표, 반대는 7만 4천여 표였다. 또 추가로 반대표가 더 많았던 지방에 대해 어떤 점에서 반대했는지를 자세히 조사하도록 했다고 한다.
과학 기술의 경우, 1983년 이토 준타로를 비롯한 일본 도쿄대 연구진이 편찬한 ‘과학사기술사 사전’에 따르면 1400년 ~ 1450년 사이의 세계 과학 기술 주요 업적으로 올라온 건수가 한국 21건이나 되는데 거진 세종 시대의 업적들이다. 동시기 중국은 4건, 일본 0건, 동아시아 이외 전 지역 19건이다.기사관련 포스팅. 글 밑부분 참조
백성들을 사랑하고 신하를 존중하며, 학문을 장려하고 재사를 등용하는 이상적인 유교적 성군으로 꼽히며 당대에 이미 고대 중국의 성군인 요와 순에 비견되어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부르며 칭송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태조 시절은 신권이 강하고, 태종 시절은 왕권이 강하며, 세종 시절은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때로 여겨진다.
다만, 세종대왕 집권 후기에는 왕권 강화 - 종친에게 적극적으로 정책을 맡기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사실 왕권 / 신권 대립 문제가 애초에 존재 자체부터 문제시 되는 떡밥 중 하나. 예컨대 신권의 대표자였던 정도전은 막상 태조가 없으면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고, 태종의 방식은 정도전 방식보다 특권층의 권한을 확장시켜주는 식이었다. 세종 중기를 거치며 특권층이 짝짓기를 시작하면서 세종의 정책에 반발할 세력을 키웠기에 세종도 맞불을 놓은 것이다.
이렇듯 많은 업적을 열거하지만, 세종대왕의 대표적인 업적은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 일부에서 가림토나 신대문자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환빠와 일빠의 드립이고,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전혀 없는 소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세종에서 세(世)자는 '영토를 넓히는 등,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던 임금'에게 주는 묘호라고 한다. 이것은 4군 6진을 개척한 업적을 반영하여 올린 것이다. 원래는 정인지 등이 문치에 공덕이 있는 왕에게 올리는 묘호인 "문종(文宗)"으로 묘호를 정하자 하였으나 나중에 그 묘호를 받게 되는 아들이 반대하면서 "4군 6진의 업적이 있으므로 세종으로 묘호를 정해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세종이 되었다. 아무튼 세종은 대내외적으로 전성기를 이끌어 낸점이 인정받아 아들 문종이 세종이란 묘호를 올렸다.
정리하자면, 어쩌다 왕의 운명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마치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집권할 때의 상황 또한 정말로 하늘이 내린 군주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세종이 선정을 펼치기에 좋았다. 당시 조선은 건국 후 혼란기에서 안정기로 접어들었으며, 선대 왕이던 태종의 엄청난 왕권 강화로 무리 없이 정책을 집행하며 정치를 할 수 있었던 점, 신생 국가답게 진보적인 인재들이 재야에 많았던 점, 젊은 세대들 또한 고려 때 태어나 자라난 세대들에서 조선 건국 이후 태어나 자란 세대들로 교체되어서 백성들이 사실상 조선으로 동화되었다는 점, 대외적 / 대내적으로는 국가급 스케일의 큰 위협이 될만한 요소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은 죽은 후에도 조선왕조가 끝날때까지 모든 왕과 문무백관 그리고 백성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고, 조선 왕조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존경받고 있다. 세종 정도로 왕조내내 존경받았던 군주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고려의 현종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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