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洪準杓 | Hong Jun-pyo
출생 1953년 11월 20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면 남지리 서동마을
본관 남양 홍씨 당홍계
신체 167cm, 62kg, A형
가족 배우자 이순삼, 슬하 2남
최종 학력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 학사
거주지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병역 육군 이병 소집해제(방위병)
소속 정당 미래통합당
현직 홍준표법률사무소 변호사
대한민국의 검사 출신 변호사, 정치인 및 유튜버. 모래시계 검사로 알려진 뒤 정치에 입문하였다.
4선 국회의원과 이명박 정부 시절 한나라당 원내대표 및 대표를 거치고,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제35, 36대 경상남도지사를 지냈다. 19대 대선 출마를 위해서 도지사 직을 중도 사퇴한 이후 대선에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하고 이후 자유한국당의 초대 대표를 역임했다.
종합적으로 볼 때 현존 보수계 정치인 중 커리어가 가장 좋은 사람 중 하나다.
굵직한 것만 봐도 서울시내 4선 의원 + 원내대표 + 재선 도지사 + 제1보수당의 대선 후보 + 당 대표 2회다.
경상남도 창녕군 출신에 경남도지사까지 역임했지만 정치적으로 PK보다는 TK 계열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본인도 스스로 TK의 성골은 아니라도 진골은 된다고 주장했다. 경상남도 출신이지만 중/고등학교를 당시 경상북도였던 대구시에서 다니며 성향과 인맥이 형성된 케이스.
1953년 11월 20일, 호적상 1954년 12월 5일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면 남지리 서동마을에서 2남 3녀 중 넷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때 이름은 홍판표. 그의 아버지는 무학에다 소작농으로 경제적으로 무능할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어머니가 고리 사채꾼에게 머리채를 잡혀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창녕군과 합천군, 대구시 등지를 전전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6군데나 전학을 다닐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사귈 수 없어 공부에만 전념했다고.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했고 초등학교에서도 1등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영양 부실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몸이 야위었고, 초등학교 졸업 당시 키가 124cm에 불과할 정도로 왜소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도시에서 공부해 보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해, 고향에 있는 중학교가 아닌 대구시 영남중학교에 진학했다. 숙식은 대구 직물 공장에 취직한 누나 방에 얹혀 살며 해결하기로 했다.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아버지와 8km를 걸어 대구행 버스를 탔는데, 무거운 지게를 진 아버지 뒤에서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절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대구 대명동 사글세방에서 누나들이 싸주는 꽁보리밥 도시락을 먹고 공부했다. 그나마 도시락도 없이 혼자 운동장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울 때도 많았다.
홍준표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결국 대구광역시로 이사왔다. 비가 오면 물이 새는 셋방 단칸에 온 가족이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사과 행상을,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도 하루 4~5시간만 자고 공부해 영남중학교(대구)에서도 1등은 그의 차지였지만 명문 경북고등학교가 아닌 영남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경북고는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경북의 일류 명문이고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본인에게 컴플렉스였고, 출세에도 핸디캡이 됐다. 심지어는 대학 첫 소개팅 자리에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이 나왔는데 그녀가 "집이 어디냐?", "대구다", "그럼 고등학교는 어디 나왔냐?, "영남고다" 그랬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이때 받은 상처로 이후로 미팅 종류를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고등학교가 어느 정도는 중시되지만 어디까지나 고등학교는 뺑뺑이지만(자사고, 특목고 제외) 당시만 해도 고교입시도 있을 정도로 고등학교도 성적순이었다. 대구경북은 당연히 경북고가 no.1이며 대구경북에서 공부 잘한다는 학생은 당연히 경북고 진학이 목표였다. 서울의 경기고 만큼은 아니라도 경북고 하면 알아줬다. 여담으로 부산경남에서는 경남고를 알아주는데 유일하게 대통령 2명(김영삼, 문재인)을 배출한 학교다. 참고로 대학교를 포함해도 대통령 2명 배출한 학교는 경남고가 유일하다. 우리나라에 대통령을 2명 배출한 대학교는 없다(문재인 경희대, 박근혜 서강대, 이명박 고려대, 노무현/김대중 고졸, 김영삼 서울대, 전두환/노태우 육사). 물론 육사는 2명 배출했다...
하지만 밑에 첨부된 그의 대학 시절 사진만 보더라도, 그의 지인들은 당시 홍준표 하면 그가 늘 신던 검정 고무신을 떠올리곤 한다. 소개팅녀의 행동이 혹시 영남고 때문이 아니라 그의 패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출신고를 묻는 그녀에게 순간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느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의 출신 고교에 대한 컴플렉스는 검찰 생활에까지 이어졌는데, 비평준화 시절 명문고등학교 출신들이 즐비한 검찰 조직 내에서도 멸시를 받았다고 한다. 명문고 출신 동문들끼리 밀어주는 문화가 만연한 상황에서 비주류의 설움을 느껴야만 했고, 원래 잘나가는 집안도 아니었고 찢어지게 가난한 흙수저 출신인 것까지 더해서 검찰 내에서도 그야말로 개무시당했다고 한다.
그는 커리어에서 평생 아웃사이더 또는 비주류를 자처했는데, 그 원인으로 출신고등학교에 대한 열등감, 자신의 가난했던 집안 배경 등으로 인한 콤플렉스를 꼽는 사람도 있다
원래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원래 고등학교 때 이과생이었다고 한다. 경북대가 국립대라서 학비가 저렴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진학할 형편이 못 되어, 아버지가 일체의 학비와 생활비가 들지 않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라고 해서 육사에 들어가 장교가 되고자 했다.
육군사관학교는 국가에서 모든 부담을 했기 때문에 사관학교 특성상 학비가 안 든다는 점도 주요한 고려 요소였다. 그런데 어느 날 대구광역시 토박이가 아닌 아버지가 시장통에서 무시당하는 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보고 힘없는 이들을 돕는 검사(법조인)가되기로 결심했다. 이에 1972년 영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때는 공부와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5층 여관집에 출퇴근 가정교사를 하면서 1살 많은 제자의 유혹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연고전 축제조차 딱 한 번 갈 정도로 바빴다. 그 와중에도 2학년 때인 1973년 동아일보 광고 사태 때 선후배들과 중지를 모아 동아일보 격려 광고를 처음 낼 만큼 정의감이 강했었다. 때문에 중앙정보부 요원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고. 대학은 어떻게든 졸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이상 시국 행동은 못했다. 강희락 경찰청장, 주상용 서울경찰청장, 이승재 해양경찰청장, 김성곤(1952) 의원,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 송하진 전북도지사 등이 고려대학교 동기다.
그의 진학 후 더 이상 대구광역시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데다, 뒷집에 불이 났는데 가족들 집까지 다 타서 가족들은 때마침 부친이 현대조선소의 경비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울산으로 옮겨갔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온 어느 겨울 밤, 일당 800원짜리 경비원 아버지가 목욕탕에나 봄직한 플라스틱 샤워의자에 앉아 칼바람 부는 바닷가 모래밭에 불을 쬐고 있던 모습을 봤는데, 그때 "불공평한 세상 한 번 바꿔보자"고 다시금 결심했다. 대학교 2학년 당시 부친이 추운 모래밭에서 근무하니 회사에서 술이라도 먹고 버티라고 막소주를 줬다고 한다. 그래서 부친은 10개월 만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역시도 "세상이 디비졌으면.." 하는 생각을 지닌 운동권이었고 박정희 유신반대 학생운동을 하며 총학생회 지하유인물을 작성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엄청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문제적 인간, 홍준표 그러나 더이상 강성으로 나가지는 않았고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을 듣고 성북경찰서에서 풀려나면서 고시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간다.
사법시험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72학번인 그가 6년이나 병역도 미루고 졸업도 미뤄가면서 고시 생활을 이어가던 중(1차는 붙은 상태였다), 고려대학교 부근 국민은행 안암동 지점에서 일하던 여자 은행원 이순삼에게 반했다.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숫기는 물론 땡전 한푼 역시 없었지만, 같은 은행에 다니는 선배의 도움으로 겨우 데이트를 하고선 "나는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 나와 앞으로 살 생각이 있으면, 다음 주 수요일까지 도서관 4층으로 찾아와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월요일 저녁에 그 여인은 정말로 도서관으로 찾아왔고 홍준표는 첫 만남의 자리에서 불문곡직하고 "형편이 되는 대로 같이 살자"는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전북 군산시에 살고 있는 장인, 장모될 분들을 만나러 둘이 내려가서는 인사를 드렸는데, 홍준표가 마음에 안 들었던 장인은 뒤에서 딸에게 "그거 구름잡는 놈이다. 택도 아닌 놈이다. 그런 놈이 고시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했다고. 장모는 "사람 착해 보이니 잘 해봐라" 그랬다며, "어떠셨대??" 하고 묻는 그에게 이순삼이 솔직히 털어놨단다. 그 덕에 "장모는 혹 용돈을 드려도, 장인어른은 용돈은커녕 26년간 내 집에 발도 못 붙이게 했다"고 훗날 2017년 자유한국당 후보 군산 유세에서 말한 바 있다. 그렇지만 정작 마지막에는 홍준표가 장인 모시고 와서 병수발하고, 임종도 지켰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장인이 "옛날에 잘못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사과하자, 이에 홍준표는 "잘못한 줄 이제 알았습니까. 편하게 가시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얼마 안 가 홍준표는 그녀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신접 살림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 7동 지하 단칸 셋방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사법시험에는 계속 떨어졌고, 결국 군대에 복무하게 되었다 당시 몸무게가 48kg으로 워낙 말랐기 때문에 방위로 근무하게 됐는데, 사법시험에 붙지 못해 고향에 가기 창피했던 그는 처가가 있던 전라북도 부안군의 해안초소에서 복무하였다.
그렇게 단기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그리고 아내의 5년에 걸친 헌신적인 뒷바라지 끝에 30살, 호적상 29살인 1982년, 드디어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어떻게 보면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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