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플로렌스 나이팅 게일
출생 1820년 5월 12일 이탈리아 피렌체
사망 1910년 8월 13일 영국 런던
국적 잉글랜드
직업 간호사, 통계학자
종교 잉글랜드 성공회
별칭 램프를 든 천사(The Lady with the Lamp)
영국의 간호사이자 행정가, 사회 개혁가.
한국에서는 백의의 천사라고 알려진 병의원 제도의 개혁자.
크림 전쟁 당시 38명의 성공회 수녀와 함께 이스탄불에서 간호사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했으며, 그 유명세를 이용해 현대 간호사의 기틀을 잡고 발전시켰기에 흔히들 "간호학의 대모(大母)"로 불린다.
통계학자, 사회 개혁가로도 활동하며 또한 통계 자료의 시각화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며, 통계 관련 서적에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크림전쟁에서 영국군 사망 원인에 관한 도표 가 유명하다.
업적들을 인정받아 영국 왕립통계학회의 첫 여성 회원이 되기도 하였고, 미국통계학회의 명예 회원이 되기도 했다.
그의 성격은 여러모로 독불장군 내지는 대장군으로 불릴 정도로 고집이 있었다고 하며, 이러한 성격도 그가 이루어낸 업적들을 달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아동문학가 신지식 선생(1930년-)이 쓴 나이팅 게일 전기(어린이 그림위인전기, 계몽사)에 따르면, 빈틈없는 병원운영능력과 영국군을 설득하여 병원운영에 필요한 간호물자를 보급받는 소통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820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별장에서 부유한 영국 상류층의 딸로 태어났다.
영국인이지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플로렌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족으로 언니 파세노프 역시 나폴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폴리의 그리스식 이름인 파세노프라는 이름이 붙었다.
자매의 출생지가 영국이 아닌데다가 각각 다른 이유는 플로렌스의 부모님이 결혼식을 마치고 떠난 세계일주급 신혼여행 때문이였다.
그는 커가면서 간호사가 되어 병들고 다친 이들을 돌봐주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신앙적 사명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절의 간호사는 상당히 하대받는 직업이었으며, 요양원에서 잡일을 하는 청소부·잔심부름꾼에 가까운 이미지가 있었기에 당연히 명문가의 딸들은 간호사가 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일부 병원을 제외하고 병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그다지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일례로 의사가 되려던 음악가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아버지가 "직접 병원에 가보라"고 말해서 18살의 나이에 프랑스 파리 대병원을 방문했다가, 쥐가 넘치고 지저분한 병원을 보고 구역질을 하며 의사를 포기하고 작곡가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찰스 다윈이 시신해부 실습 당시 고어함에 질려 의사의 꿈을 접고 생물학자가 된 것처럼 당시 유럽을 포함한 웬만한 나라들의 의료계가 이랬다.
부잣집은 병원에 가느니 아예 실력 좋은 의사를 찾아 직접 주치의로 고용하여 병원이라는 곳을 기피했을 정도였고, 사실 실력이 좋다면 이런 식으로 개인에게 고용되는 게 의사에게도 병원에 들어가는 것보다 여러모로 이득이였다.
병원이 위생적이고 깔끔하게 바뀌게 된 시기는 위생학이 발전하고, 세균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20세기 초 부터이며, 그전까지 병원은 돈 없고 가난한 서민들이나 들어가는 곳이었고 부자들이나 귀족들은 주치의를 직접 두거나 왕진을 다니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또한, 당시에는 낮은 임금을 주기 위해 교육수준이 낮은 여성들을 주로 고용했기 때문에 간호사들의 직업의식이나 능력도 매우 떨어지는 편이라 전문 직업으로 인정도 받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간호사는 아직도 처우가 나쁜 직종이다.
그런 이 시대에, 금수저 집안의 귀한 막내딸이었던 플로렌스가 가족들에게 '간호사가 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라며 사회에서 멸시받는 간호사가 되겠다고 선언하니 집안의 분위기는 BOOM.
아버지는 상당한 부호였으며 지역 시의원이었기에 그 지역에서 알아주는 명문 집안으로, 플로렌스도 어릴 적부터 아가씨 소리 들으며 귀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나중에 주지사 선거에도 나갔을 정도다(낙선했지만). 플로렌스의 간호사 일을 막기 위해 아버지는 강제적으로 혼사를 여러 번 준비했으나 플로렌스는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어쨌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하여 간호사가 된 이후, 크림 전쟁에 군 간호사로서 참여하게 된다.
위인전에 나오는 나이팅게일의 모습은 주로 이 시절의 모습. 당시 전쟁에서는 총 맞아 죽는 병사보다 죽지 않을 정도의 부상을 치유하지 못해서 사망하거나, 병사(病舍) 내 전염병이 돌아 사망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심각한 위생상태와 맞물려 작은 상처가 아물기 전에 감염이 된다든지, 파상풍에 걸린다든지 하는 문제는 일상다반사로 전사자보다 부상으로 인해 전투 후 사망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이팅게일은 군 위생(軍 衛生)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열악한 보건위생 때문에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지원을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각종 통계자료를 만들어 제시하며 끊임없이 보냈으며, 결국 영국의 지원을 받아낸다.
즉, 위생을 처음 도입했다. 이미 1600년대부터 위생의 개념이 있었으며 1800년대 초중기에 위생법 등이 발효되었으나, 실제로 실행에 옮긴 것은 그녀라고 봐도 무방하다. 덕분에 영국군 부상자의 사망률은 40%대에서 2%로 감소하는 기적을 보게 된다.
이후 나이팅게일이 영국군의 사망률을 눈에 띄게 감소시킨 점, 그리고 밤마다 등을 켜고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다닌 점 등의 이미지가 합쳐져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라는 이름으로 각종 언론에서 앞다투어 보도하며 나이팅게일은 유명세를 타게 된다.
전쟁 중 나이팅게일은 지역 풍토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침대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에서 얻은 유명세를 이용하여 기부를 받아(더 정확히는 funding을 받아) 1860년 7월 9일 자신의 간호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낸 최초의 근대식 간호 학교를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 설립했다.
당시 전염병에 대해서는 2가지 학설이 존재했다. 하나는 히포크라테스부터 시작된 장기설(나쁜 공기가 병을 만들어낸다)이었고, 또 하나는 루이 파스퇴르 등을 비롯해 당시 막 발견되기 시작했던 미생물설(미생물이 병을 만들어낸다)이었다.
현대에는 미생물설이 맞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당시에는 장기설이 조금 더 우세했고, 나이팅게일도 장기설의 강력한 지지자였기 때문에 이 병원에서는 공기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창문의 위치, 크기, 간격, 환풍기의 위치, 개수 등 공기를 깨끗하게 하기 위한 조건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나이팅게일이 지지했던 학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지금 보면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조건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결국 장기설에서 주장하는 '나쁜 공기' 자체가 병원성 미생물을 포함하고 있는 비위생적인 공기였기 때문에 나이팅게일이 주장한 위생적인 환경은 치료에 분명히 의미가 있었고, 병이 전파되지 않기 위한 환자와 환자 사이의 최소거리, 환자가 편안함을 느끼도록 온도, 습도 등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할 것, 환자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개인별 조명을 설치할 것 등 현대 병원설계에서도 다수 포함하고 있어 병원 건축에서도 상당히 참고하고 있는 것들도 많다.
그러나 환자와 환자 사이의 최소거리라던지, 간호사 1명당 담당하는 최대 환자의 수[9] 등은 병원의 수익문제로 지켜지고 있지 않은 것들이 훨씬 많지만, 원칙상 지켜야 하기는 한다는 게 중론. 참고로 나이팅게일이 세웠던 병원은 다른 병원보다 환자의 만족도나 회복속도가 월등히 좋다고 한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국제적십자에서는 매년 세계의 우수한 간호사들에게 나이팅게일 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후학들이 간호사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나이팅게일 선서는 간호사들의 좌우명으로 알려져있다.
그가 남긴 업적과 행적을 모두 보면 현장에서만 뛰며 근무를 하는 간호사라기보다는 보건 행정가에 가깝다. 즉, 나이팅게일은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전문가라기보다는 행정가, 정치가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간호사 중에 간호감독 등 행정직이 있어서, 간호사라는 것이 완전 틀린 것은 아니다.
성격 역시 온화하고 부드러운 귀족 여인이라기보다는 여러모로 강단 있는 모습을 보였다.
배짱도 좋고 집안도 좋은 그가 단호히 개혁의 칼날을 휘둘렀기에, 그전까지의 전근대적 병원 행정과 간호사의 지위가 진일보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실제로 그는 크림 전쟁 종결 이후 한때 봉사한 적이 있었던 구빈원의 의료 복지 체계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크림 전쟁의 전쟁 영웅으로 대우받은 지라 인맥도 넓었고 꾸준히 주장한 덕에 동조자들 및 조력자들을 쉽게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력자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 근거를 더욱 확충하고 논리를 보강할 수 있었고. 중간에 그의 제안에 호의적인 자유당이 선거에서 패하는 악재가 터지는 바람에 원안대로 추진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자신의 제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영국에서 1911년에 실시될 국민보험법과 1946년 시행된 전국민 의료복지의 선구적 조치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통계 자료의 시각화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며, 통계 관련 서적에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크림전쟁에서 영국군 사망 원인에 관한 도표가 유명하다. 이른바 장미 도표(Rose diagram)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그래프의 모양이 활짝 핀 장미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후에 나이팅게일은 영국 왕립 통계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선출될 정도이다.
위인전 같은 데서는 크림 전쟁 때 이야기만 나오기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의외로 크림 전쟁이 터진 뒤에도 꽤 오래 살았다. 사망했을 때 나이가 90살.사실 이렇게나 오래 살았기 때문에 말년에는 영국인들조차도 나이팅게일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알고 놀랐다고 한다.
참고로 말년에 제자인 팬위크와 간호사 면허 제도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싸웠다.
나이팅게일이 간호학이라는 학문의 시초인 이유는 간호사 제도를 확립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간호 철학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팬위크는 현대 간호사의 제도적인 부분에 많은 발전을 가지고 왔다.
영국간호사협회의 창립자이자 ICN(International Conference of Nursing, 국제간호사협회)의 초대 회장이다.
나이팅게일은 간호란 사명정신,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면허제도에 거부감을 가졌으나, 팬위크는 전문성을 강조하면서 면허제도를 주장하였다.
결국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숨진 뒤부터, 이쪽 세력은 힘을 잃었다. 1919년 영국에서 간호사 면허시험이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간호사가 되려면 면허 시험을 봐야 했다. 결과적으로 간호사들이 전문직으로 대우받는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현대 간호학자들의 입장은 나이팅게일과 팬위크 둘 다 큰 기여를 했다는 것. 물론 대중적 인지도나 간호철학에서의 영향력은 팬위크가 나이팅게일에게 상대가 되지 않고, 간간히 간호학 개론에서 이름을 보이는 수준. 또한 제자들이 미국에도 많이 건너가서, 오히려 미국쪽에 더 빨리 간호가 발전하게 됐다.
대단히 오래 살았기 때문에 대영박물관 아카이브에 육성이 보존되어 있다.
1890년에 녹음된 자료이니 나이팅게일이 70세 정도의 노년일 때 녹음한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1910년 8월 13일에 향년 90세로 삶을 마감했다.
그의 공적을 기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햄프셔 주 웰로에 있는 성 마거릿 교회 내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에는 나이팅게일을 기념하는 부조가 벽면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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