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969년 8월 19일
국적 미국
출신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
학력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영학 전공
가족 부인, 아들(2015년생)
신체 178.4cm
종교 개신교
직업
前 의류 사업
前 영어강사
前 레스토랑 웨이터
現 가수, 現 작곡가, 現 작사가, 前 프로듀서
활동 시기
1991년 ~1993년(본명 활동)
2001년(V2 활동)
2019년 12월 ~ 현재(컴백 활동)
소속팀 V2
소속사 엑스비
예명 JIY(쟈이)
대표곡
리베카
가나다라마바사 (Pass Word)
Dance with me 아가씨
Fantasy
장르 뉴 잭 스윙, 댄스 팝 등
재미교포 출신의 가수. 1990년 11월 <리베카>를 타이틀곡으로 한 1집 앨범으로 데뷔했으며 1991년부터 1993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활동이 없다가, 2001년에는 V2라는 혼성 그룹으로 잠깐 다시 활동한 후 연예계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데뷔 30여년 후인 2019년에 유튜브를 통해 과거 영상의 춤, 노래, 패션 등의 다양한 모습들이 재조명 받게 되고 슈가맨을 통해 양준일 신드롬을 만들어내며 다시 미국에서 한국으로 소환되었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인 부모를 따라 베트남에서 출생하고 홍콩, 일본, 한국에서 살다가 9살 때 미국 LA로 이민을 가서 정착했다.
어린 시절 조용한 성격이지만 춤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또래 아이들이 시비를 걸어 다투는 일이 있었지만, 중학교 시절에는 춤을 잘 춰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할리우드 1세대 한국 배우이자 교수인 고 오순택과의 식사자리에서 '너는 한국이나 일본에서 자랐으면 연예인이 됐을 아이'라는 말로 가족들 모두 충격을 받고 식사자리를 마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고등학교 2학년 재학시절 친구와 함께 오른 무대에서 음악에 재미와 흥미를 느껴 본격적으로 가수를 준비하게 된다.
USC에 재학 중에 이범희의 눈에 띄어 한국에서 데뷔했다. 1집과 2집이 서울음반사를 통해 발매되었다.
1991년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신인 가수들을 위해 마련된 '병아리 무대'를 통해 공중파에 데뷔했는데, 이 때 당시 동시에 무대에 섰던 가수로 심신, 윤상, 박정운 등이 있었다.
노래 자체는 동시대의 다른 한국 가요에 비해 상당히 미국에 근접해 있어서 좋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마른 몸에 큰 키와 긴 머리, 지나친 미국식 퍼포먼스, 노래에 심히 몰입해서 정신 없어 보이는 춤 등은 1990년대 초반의 코드와 맞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당시 트렌드에 맞지 않아 대중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한 케이스.(당시 영상 / 당시 영상 2)
당시 미국 팝계의 뉴 잭 스윙, 하우스 음악 트렌드를 가요에 이식하려 시도했다. 뉴 잭 스윙 음악은 1992년 3월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동년 8월 현진영 2집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으며 본격적으로는 1992년 11월에 발매된 양준일 2집 앨범과 1993년 4월 발매된 듀스 1집(이현도)에 의해 한국 가요에 접목되었고 터보나 룰라가 춤의 트랜드를 일부 계승하면서 본격적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한 가지 옥에 티로, 그 당시 <리베카>는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표절곡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리베카의 원곡은 이범희가 작곡한 '전원의 이별'이란 곡으로 1987년 발매된 이명호의 2집 앨범과 1988년 발매된 모아모아의 앨범 〈방황의 끝〉에 수록되어 있다. '전원의 이별'에서 가사를 양준일이 새로 쓴 것이 리베카다.
다른 활동곡들인 <가나다라마바사>, 는 양준일이 직접 작사/작곡한 곡들이다.
당시 다른 방송사들에서 양준일에 대해 보수 시각 일색이었던 것과는 달리,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서울방송(SBS)에선 양준일을 열심히 밀어주었다. 당시 SBS의 간판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쇼! 서울서울에서는 반고정에 가까울 정도로 자주 등장했으나, 당시 서울 등 수도권에서만 본방송으로 시청 가능했던 한계 그리고 극과 극으로 갈렸던 대중의 반응 때문인지,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또한, 중간중간 콩트 설정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언어 문제로 웃기만 하자 MC 정재환에게 '말 좀 하세요.'라며 핀잔을 듣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SBS를 포함하여 의외로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다만 당시 방송가는 교포 출신으로 한국말이 서투른 양준일의 어리숙한 면을 희화화시켜 양준일의 이미지를 많이 소모시키는 역할로만 활용하였다. 현재 시각에서는 충분히 출연자를 배려하지 못한 것에 비난을 받을 요소가 충분하지만, 당시 보수적이었고 큰 방송사가 세 군데만 있었던 환경이었기 때문에 양준일로써는 자신의 노래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양준일은 방송 출연을 통해 자신의 노래를 홍보할 수 있기 때문에 모욕감을 감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활동 당시엔 느끼하고 이상하다는 평가가 많았고, 2집 타이틀곡 <가나다라마바사>의 중반부에는 양준일 스스로 “여잔지 남잔지 모르겠다”등 세간의 평가를 셀프디스했다. 1990년대 초반 당시의 미남 기준이 지금과 다소 다른 것도 있지만, ‘기생오라비’라 불리우는 여린 미형 외모에 마른 체구, 특히 긴 파마머리까지 한 그는 기성 세대들에게 좋지 않은 인식을 주기 쉬웠다.
패션 또한 지금 보기에도 촌스럽지 않게 잘 입었다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엔 단정하지 않게 보였고, 여기에 방방 뛰어다니며 생소한 장르의 음악을 불러대니 대놓고 좋아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오늘날에 와서야 재평가의 요소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91~93년에 활동하였고 엇갈린 시선과 함께 크게 뜨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가사 또한 한계가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H.O.T를 보면, '가사'가 당시 10대들에게 공감가는 면이 많다. 순정적인 가사는 물론, 당시 한국의 교육 실태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 등. 하지만 양준일은 재미교포 출신답게 정서적으로 붕 뜬 가사를 적었다. 역시 많은 외국어 가사에 같은 가사가 반복되니 마치 클럽음악처럼 느껴질 뿐, 딱히 10대들에게 정서적으로 와닿지가 않았던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양준일은 신선하고 파격적이라는 평가는 받았지만, 깊게 공감하며 열광하지는 못하고 정서적 거리감으로 인해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1993년 철이와 미애 2집 <뚜벅이 사랑>, <이별 후유증> 등을 작곡하고 프로듀스했다.보기보기
2001년 V2의 정규 1집인 를 끝으로 가수 활동을 중단했다. 당시 타이틀곡인 Fantasy의 무대는 물론 가사 또한 매우 독특해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사는 "그녀가 떠나는 꿈이었어. 빨래를 걷어야 한다며 기차 타고 떠났어.", 그리고 같은 앨범의 의 "너 오브가 코스지" 등. 또한 과 는 가사가 독특하게도 한국 가요임에도 불구하고 영어로만 이루어져 있다(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구성).
V2 활동당시 양준일이 아닌 JIY(쟈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V2 활동 시기에도 소속사와 계약에 문제가 있었으며 슈가맨에서 본인이 언급하기로는 계약서에 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많았으나 영어를 가르치면 안 된다는 내용은 없었기에 은퇴 이후에는 일산에서 가정집에 아이들을 초대해 공부하는 공부방 형식의 영어강사로도 활동했다.# 특이한 학습 방법으로 영어교육을 접근하였으나, 입시 위주의 학습을 선호하는 풍토로 인해 그다지 좋은 반응은 얻지 못했다고 한다. 양준일의 학습법은 훗날 양준일의 팬미팅에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시기에 현재의 부인을 만나서 2006년에 결혼하고, 결혼생활 10년 만인 2015년 뒤늦게 늦둥이 아들을 가지긴 했지만 하술한 내용과 같이 결국 영어교육 사업도 접고 부모님이 계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재미교포인 양준일과는 달리 부인은 순수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미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고, 가장으로써 생계를 유지해야 했지만 많은 나이에 새 직장을 찾는데 힘들었기 때문에 슈가맨 3에 소환되기 전까지 레스토랑 카운터 직원, 창고 화물 운반업 등을 전전하다 플로리다 주 브랜든의 한국식당에서 서빙 활동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갔다.
G-DRAGON을 닮은 활동 당시 모습이 2018~19년 유튜브에 돌아다니며 그 당시 모습을 보지 못한 1990~2000년대 생 사람들도 궁금해 하는 존재가 되었다. 2012년 무한걸스, 2019년 프리한19 등에서 소개되기도 했는데, 방송국에서도 양준일의 근황을 찾지 못해 다음 팬카페 회원들이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다. 심지어 라디오 코리아에 "양준일 씨를 찾습니다"라는 사연이 2019년 초에 나가기도 했다. 예전에 같이 라디오 방송을 했던 동갑내기 가수 윤종신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양준일에 대해 "지금 들으니 지대로 뉴 잭 스윙 ㅎㅎㅎ 아주 멋지다.. 무대매너도 캐간지.."라고 언급했다.
2019년 5월 그의 근황이 확인되었다. 2015년부터 부인과 아들과 함께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거주 중이며, 한인 레스토랑 서빙 일을 했지만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출연 이후 팬들과의 만남을 위해 사직했다고 한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팬카페 판타자이에서 그가 쓴 글들을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에도 판타자이라는 카페가 있지만 카페연혁을 보면 드라마, 게임, 설현 등의 카페였다가 크리스마스에 갑자기 판타자이로 바뀌어 운영하는 카페 판매업자의 사칭카페로 추정되니 주의 바란다.
2019년 8월 12일에 방영한 옥탑방의 문제아들 40회에서 이날 90년대 지드래곤이라는 별명으로 재평가받고 있는 사람으로 출제되었다. 이날 게스트였던 터보의 멤버 김정남과 가수 김완선은 그때 당시를 회상하면서 시대를 앞서간 천재라고 칭송했으며 김완선의 경우 1990년대 초반에 그와 함께 듀엣 무대를 서본 경험이 있었다고 밝혔다.
2019년 12월 4일 tvN 수요일은 음악프로 이별 노래 편에서 뮤지가 양준일이 V2시절 낸 'Fantasy'를 추천했다
2019년 12월 6일 방송된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3 2회에서 재석팀 슈가맨으로 나오면서 드디어 매체에 모습을 드러냈다. 슈가송은 데뷔곡인 <리베카>
출연 이전에 프롤로그에서 유희열이 그의 곡인 '가나다라마바사'를 소개하였는데, 아무도 불을 켜지 않았다
당일 무대에 리베카가 나왔을 때 40대에서는 24개의 불이 켜졌고 10대도 유튜브의 영향 때문인지 제법 불을 켠 사람들이 많았으나 20~30대는 현저히 적었다. 또 10대들 한정으로 이 노래가 지금 나오면 뜰 것인가에 대한 평가도 전원 '뜬다'로 호평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40대석의 남성 한 명이 그와 이름이 비슷한 양준혁이라는 오답을 내뱉어 주변을 빵터지게 했다... 또 둘 다 1969년생 동갑내기다.
비록 외모는 세월이 세월인 만큼 변화가 컸지만 역변할 정도로 늙지 않았다. 50대라고 밝히자 슈가맨 관객이 웅성거릴 정도. (딱 50세이긴 하지만) 훤칠한 키에 몸매도 늘씬한데다 몸놀림도 여전했다. 무엇보다 선한 성품이 묻어나는 표정과 말투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를 얻게 된 출연. 출연진으로부터 90년대 GD라는 소릴 듣자 본인은 괜찮은데 GD는 싫어할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한국에서 가수 생활을 할 당시 겪었던 어려움과 부당함으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샀다.
마지막에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그는 "딱히 계획이라는 걸 세우지 않는다. 그 순간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계획이라는 게 그나마 있다면 겸손한 아빠이자 남편이 되고 싶다."며 대답했다. 자유롭고 트랜디한 영혼을 가진 그에게 어울리는 멋진 대답이다.
또한, 20대의 자신에게 '네 뜻대로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내가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뤄질 수밖에 없어!'라는 명언을 남기며 힘들었던 젊은 날에 위로를 건네 많은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방송 1주일 후 미국에서 보낸 감사인사 영상을 슈가맨에서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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